[야옹다옹] 프로 12년차에 찾아온 오재일의 티핑포인트
16.05.19 16:21
프로 12년 차.
강산이 변하고도 남은 시간이지만, 두산 오재일의 야구 인생에는 이제야 볕이 들었다. 그는 “아직은 '잘했다’는 말보다 ‘잘하고 있다’는 게 맞는 것 같다”며 몸을 낮췄지만, “시즌 시작부터 이렇게 야구가 잘 된 적은 없었다”며 흐뭇해했다.
2005년 현대에 입단할 당시 오재일(두산)은 ‘거포 유망주’였다. 188㎝ 95㎏의 뛰어난 체격 조건에 수준급의 수비력과 장타력까지 갖춰 팀 내에서도 거는 기대가 컸다. 특히나 오재일은 상무 복무 시절(2007~2008년) 동기생 박병호(미네소타)와 함께 ‘좌우쌍포’로 팀 중심타선을 지키며 매서운 방망이를 자랑했다.
하지만, 1군에서의 그의 성장은 더디기만 했다. 넥센 시절 당시 사령탑이었던 김시진 감독의 양아들이라는 말까지 들으며 기회를 보장받았지만, 좀처럼 그의 방망이는 응답하지 못했다. 기라성같은 선배들과의 경쟁도 그에게는 버겁기만 했다.
오재일 “넥센 시절 원정경기를 갔다가 숙소에서 김시진 감독님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탄 적이 있다. 그때 감독님이 ‘내가 어디 가는지 안 궁금하냐’라고 물으셔서 ‘어디 가시냐’고 여쭤봤더니 ‘너 고소하러 법원에 간다’고 하더라. 그 얘기를 듣고 어리둥절해 있는데, 감독님이 ‘그렇게 기회를 줬는데, 지금까지 터질 것처럼 하다가 아직도 안 터지는 너를 사기죄로 고소하려고 그런다’고 말씀하셨다.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는 강렬한 농담이다. 감독님도 그렇게 답답하셨는데, 나는 오죽했겠나.
결국 오재일은 2012년 이성열(한화)과의 맞트레이드로 두산의 유니폼을 입게 됐다. 당시 김시진 감독은 오재일을 떠나보내며 “나는 너 양아들이라는 말까지 들어가면서 기회 주려고 했다. 물론 너도 노력을 많이 했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 이적이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선 오재일에게 두산은 더 치열한 전쟁터였다. 2군에서 ‘배리본즈’로 불릴 만큼 무대가 작게 느껴졌지만, 그는 1군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기존에 있는 선수들에게 치였고, 외국인 타자 영입으로 뒤로 밀렸다. 그는 늘 기회의 목마름을 느꼈지만, 스스로를 다독이는데 만족해야했다.
오재일 “2군에서 잘하고 있는데, 1군으로 올라가지 못할 때 선수들은 서서히 지쳐간다. 나도 2군에서 오랜 시간 있으면서 상실감과 좌절감을 많이 느꼈다. 2군에 젖어서 무기력해지다가도 ‘이러면 안 돼’ 라고 마음을 다잡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다 가끔 1군에 올라가서 경기에 나가기라도 하면 ‘ 내가 꼭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주전이 될 수 있다’는 욕심을 부리게 되더라. 그러면서 스스로 더 무너졌던 것 같다.”
인고의 시간을 견딘 덕에 2016년,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비상하고 있다. 오재일이 올 시즌 23 경기에서 보여준 5홈런 7타점‧타율 0.392(74타수 29안타)의 타력은 두산 상승세의 큰 힘이 됐다. 지난 6 일 오른쪽 옆구리 통증으로 1군 엔트리에서 빠지며 잠시 숨 고르기를 했지만, 오재일은 그 또한 상승세 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오재일 “이전과 다르게 그냥 편하게 마음먹고 (타석에) 들어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하게 된 것 이 올해 야구를 잘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싶다. 욕심을 버리니 타석에서 급하지 않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게 공을 정확히 볼 수 있는 힘이 됐고, 나쁜 볼에 방망이가 안 나가니 볼카운트도 유리한 쪽으로 가져갈 수 있게 됐다. 사람들이 타석에서 정교해졌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생각의 차이가 야구를 더 잘하게 만들어 준 것 같다. 스프링캠프 때부터 김태형 감독님이 ‘타석에서 공 격적으로 덤벼라’라고 말씀해주신 부분도 큰 힘이 됐다. 이번에 옆구리 통증으로 쉬었지만, 오히려 아 픈 것을 안고 가는 것보다 낫다. 몸이 안 아프니 야구가 더 잘 될 수도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만 한다.”
여전히 두산 야수진의 경쟁은 치열하다. 선수들이 우스갯소리로 ‘경기 중에는 화장실 다녀오기도 눈치 보인다. 부상이나 부진으로 2군에 다녀오는 것은 더 위험하다. 자리를 비우면 곧바로 누군가가 채우기 때문이다’고 말하는 것도 엄살은 아니다.
오재일 “사실 여전히 팀 내 1루나 지명타자 포지션의 경쟁자들은 있지만, 나만 잘하면 어느 자리든 꿰 찰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비웠다. 내가 갖고 있는 게 매력적이라면 감독님이 나를 안 쓸 이유가 없 는 것이다. 오히려 (김)재환이가 잘해서 기분이 좋다. 재환이도 그동안 1, 2군을 오가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 같이 잘 돼서 다행이다. 이제까지 프로에 입단해서 풀타임을 뛰어본 적이 없는데, 올해는 하고 싶 다. 부상을 늘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오랜 시간 노력하다 보면 우리는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티핑포인트(tipping point)’라는 말이 있는 데, 이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변화하는 극적인 순간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99℃의 물이 100℃가 될 때 불과 1℃의 차이지만, 물은 질적으로 달라진다. 우리 삶에도 티핑포인트가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을 위해 서 물이 끓기를 기다려야 하듯이 인내하며 준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문제는 우리의 삶 속에서 티핑포 인트가 어느 시점에 언제 찾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프로 12년 차에 야구 인생의 티핑포인트 를 맞이한 오재일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