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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다옹] 가난이 싫었던 소년의 유일한 희망

16.06.03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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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미인 ‘달인을 만나다’] 열정과 투지가 넘치는 그라운드에는 자신만의 생존 방법으로 별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달인’이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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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이 죽기보다 싫었던 소년의 유일한 희망은 야구였다. 야구를 할 때만큼은 행복했고, 야구로 성공해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학창시절 돈이 없다는 이유로 얻지 못한 기회에 대한 울분은 그런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이 소년은 자라서 한 시대를 풍미하는 투수가 된다. 그 주인공이 바로 박명환(현 NC 투수보조코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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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OB 베어스(두산의 전신)에 입단한 박명환은 시속 150km가 넘는 빠른 공과 위력적인 슬라이더를 무기로 리그를 호령했다. 특히 그가 구사한 슬라이더는 구속이 빠르고 휘는 각이 커 타자들에게는 알고도 못 치는 공이었다. 
박명환의 전성기는 2004년이었다. 그는 26경기에서 12승 3패‧평균자책점 2.50을 기록, 평균자책점 1위와 탈삼진 1위(158⅔이닝 162탈삼진)로 2관왕을 차지했다. 이때부터 박명환은 배영수(한화)-손민한(NC 은퇴)과 더불어 우완 트로이카로 명성을 떨쳤다.
2006년 시즌 후 FA(프리에이전트) 자격을 얻은 그는 4년간 40억 원에 LG로 이적했지만, 어깨 수술과 잇따른 부상으로 고전하다 2012년에 방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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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 인생의 반을 어깨 통증으로 힘들어했음에도 박명환은 야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야구는 희망이자 기쁨이기 때문이다. 포기하지 않고 재활에 매달린 끝에 2013년 말 신고선수 신분으로 NC에 입단할 수 있었다. 두산 시절 자신의 전성기를 지켜봐 왔던 김경문 감독과의 반가운 재회였다. 박명환은 NC의 유니폼을 입고 통산 1400탈삼진과 의미 있는 선발승을 달성했다. 
야구를 향한 그의 열정도 시간의 흐름을 비껴가진 못했다. 박명환은 지난해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택했다. 여전히 은퇴라는 단어에 목이 메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지만, ‘행복했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현재 NC 2군에서 투수보조코치로 제 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달인을 만나다-박명환 편’은 ‘1부-가난이 싫었던 소년의 유일한 희망’과 ‘2부-양배추로 기억되고 싶은 남자’로 나눠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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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시절 뒤늦게 빛을 본 케이스다. 당시 박명환을 기억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대단한 투수가 될지 몰랐다는 반응도 있다. 

박명환  "요즘에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운동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전에는 돈이 없는 아이들이 운동을 했다. 내가 그랬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다. 어머님께서 파출부일을 하시면서 내 뒷바라지를 하셨다. 하루에 2~3만원 버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가 야구를 하면서 돈이 많이 들었다. 아무래도 여유가 있는 집 아이들의 경우 경기가 있거나 평소에 부모님이 학교에 찾아와서 간식도 넣어주고, 회비 같은 것도 잘 냈지만 우리 집은 그렇지 못했다. 힘든 가정환경 때문에 수치심을 느끼는 일들도 많았다. 경기 출장에서도 제약이 생기더라. 그래서 실력을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그런 상황들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난에 대한 수치심과 환경에 대한 억울함이 도리어 야구를 잘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되더라. ‘이걸 내 스스로가 딛고 일어서면 좋은 선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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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가 어린 박명환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자 성공의 돌파구로 여겨졌던 것 같다.

박명환  “그렇다. 가난이 싫었다. 힘들게 일하시는 어머니를 보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꼭 야구로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그래서 학창시절에는 남들보다 2~3시간 일찍 운동장에 나왔고, 1시간 늦게 집에 갔다. 야구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버텨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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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에 입단한 후 전성기를 달렸다. 2001년에는 생애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보기도 했는데. 

박명환  "오비에 입단하는 것이 꿈이었다. 아버님께서 충청도 분이셨다. OB의 본래 연고지도 충청도가 아닌가. 그래서 늘 아버님이 운영하는 양복점에 가면 OB 경기가 틀어져있었다. 어렸을 때에는 야구경기 보면서 자장면 곱빼기 먹는게 가장 큰 행복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OB라는 팀을 동경하게 된 것 같다. 입단해서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행복했던 순간들이 더 많았다. 2001년에 몸이 좀 안 좋았는데, 당시 김인식 감독님이 ‘네가 부상에서 돌아오면 우승을 할 수 있다’는 격려의 말이 힘이 됐다.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지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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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 신분으로 당시에는 큰 금액인 4년에 40억원을 받고 LG로 이적했지만, 첫 해를 제외하고 내리막길을 걸었다. ‘FA 먹튀(‘먹고 튀다’의 줄임말로 고액연봉에 비해 성적이 떨어지는 선수를 조롱하는 말)‘라는 오명도 들었는데. 

박명환  "두산에서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LG에서는 야구 인생에 밑바닥을 찍었다. 내가 야구를 하면서 11년 동안 어깨 때문에 고생을 했다. 좋은 대우를 받고 LG로 갔기 때문에 잘하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어깨가 따라주지 않았다. 첫 해에는 경기에 나가기 전 3kg짜리 아령공으로 어깨를 미리 빼놓고 던졌다. 그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그때 나는 내 몸을 돌보지 못하고 미련하게 야구를 했지만 지금 후배들에게는 그러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가장 후회 된다. 아프면 참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휴식과 치료가 있어야한다. 투수에게 어깨는 소모품이라고 얘기를 많이 한다. 잘 단련하고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후배들은 나같이 아파서 전성기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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