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다옹] 롯데를 위해 살았던 원팀맨 조성환
16.07.07 15:21
[야옹미인 ‘달인을 만나다’] 열정과 투지가 넘치는 그라운드에는 자신만의 생존 방법으로 별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달인’이라 부릅니다.
믿음과 신뢰는 한 사람의 가치관을 바꾸기도 한다. 조성환에게 롯데가 그런 존재다. 그는 “내 야구 인생은 ‘나를 위했던 시간’과 ‘팀을 위한 시간’으로 나뉜다”고 했다.
조성환(KBS N 스포츠 해설)은 ‘원팀맨’이다. 1999년 롯데에 입단해 16년 동안 사직구장에서 청춘을 바쳤다. 현역 시절 내내 롯데의 유니폼을 입고 치고, 달렸던 그에게 팬들은 ‘레전드’라는 칭호를 붙여줬다.
물론 16년이라는 시간이 그에게 마냥 달콤했던 것은 아니다. 2003년 프로 입단 후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롯데의 스타로 떠올랐던 그는 이듬해 경기 중 손목부상으로 수술대에 올랐다. 재기를 꿈꾸며 재활에 매진했지만, 병역 비리 사건에 연루돼 홍역을 치렀다.
한창 야구의 물이 오를 시기에 생긴 공백기는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예전처럼 다시 야구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죄책감에 대인기피증마저 생겼다.
그런 그를 기다려준 것이 롯데였다. 롯데의 믿음이 고마웠던 조성환은 복귀 후 팀을 위해 뛰었다. 순전히 ‘팀이 나로 인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은퇴를 선택하는 순간에도 그는 팀을 생각하는 진정한 ‘롯데맨’이었다.
‘달인을 만나다-조성환 편’은 ‘1부-롯데를 위해 살았던 원팀맨’과 ‘2부-영원한 캡틴이 말하는 주장의 품격’으로 나눠 연재된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2차 8순위로 롯데에 지명을 받았다. 뒷 순번이라 입단 후 생존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은데.
조성환 “프로에 들어온 지 얼마 안돼서 ‘내가 1군에 올라가려면 1년은 넘게 걸리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데, 다른 선수들과 비교해 나는 한참 부족했다. 눈으로 보기에도 실력 차이가 느껴지더라. 신인 때 1군에 한 번 올라간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된 김명성 전 감독님이 나를 이름 대신 등번호로 부르더라. ‘야 43번’ 이렇게 말이다. 그때 내 이름을 불러 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만큼 존재감이 미비했다는 얘기다.(웃음) 당시 1군에 있으면서 큰 배움을 얻은 것이 있다. 홈경기가 끝나고 집에 가려고 하는데, 선배들이 나를 찾더라. 무슨 일인가 했더니 타격 훈련을 도와주겠다는 것이었다. 야간 경기가 끝난 후라 이미 시간이 밤 11시가 됐는데도 박정태, 공필성 선배는 집에 가는 대신 나머지 훈련을 했던 것이다. 그걸 보면서 ‘기라성 같은 선배들도 경기 끝난 후에 이렇게 훈련을 하는데, 나는 잠을 잘 자격이 없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그 충격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 2003년 주전으로 발돋움했지만, 불미스러운 일로 그라운드를 떠나 있어야 했다.
조성환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겼다. 개인적으로도 절망스러운 시간들이었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고 그 선택으로 인해 대가를 치렀다. 그 일로 4년을 쉬면서 주위에서는 ‘다시 야구를 하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거기서 물러날 순 없었다. 재기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고, 롯데에서는 나를 기다려줬다. 사실 팀이 선수를 4년씩이나 기다려준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에 야구에 대한 내 가치관도 바뀌었다.”
- 가치관이 바뀌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조성환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어떻게 하면 내가 야구를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고민하던 선수였다. 하지만, 공백기 이후 롯데와 팬들이 내게 보내준 믿음과 애정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때부터는 ‘어떻게 하면 나로 인해 팀이 좋아질까. 팀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고민을 하면서 야구를 했다. 선수라면 당연히 야구를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 것인데, 그 포커스가 단순히 개인의 욕심이 아닌 팀을 위한 헌신이 되더라.”
-그런 마음가짐 때문이었는지 2008년에 복귀해 팀 포스트시즌 진출에 힘을 보냈다. 그해 생애 첫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했는데.
조성환 “당시 복귀하면서 두 가지 고민을 안고 있었다. ‘과연 내가 스프링캠프에 갈 수 있을까’와 ‘경기에 나갈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였다. 공익근무를 했던 2년 동안 휴가를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제대 때 맞춰 2007년에 마무리캠프에 가고 싶었기 때문에 가을에 휴가를 몰아서 썼다. 당시 로이스터 감독이 롯데에 부임해 선수들을 보기 위해 마무리캠프에 왔다. 선수단 파악을 위해 지난 2년 동안 경기 비디오를 분석하고 왔더라. 나는 그동안 군 복무 중이었기 때문에 마무리캠프에서 나를 처음 본 감독이 구단 사람들에게 내가 누구냐고 물어봤다더라. 사연을 전해 듣고는 나를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고, 로이스터 감독은 나를 보자마자 인사 대신에 ‘캠프에 가서 너에게 포커스를 맞추겠다’고 말했다. 마무리캠프 내내 ‘스프링캠프 명단에 들어갈 수 있을까’를 걱정했던 내 고민이 한순간에 해결된 것이다. 공백기가 길어 실전에 대한 우려가 컸지만, 로이스터 감독은 캠프 막바지에 선수단을 불러놓고 시즌 타순을 불러줬다. 그때 로이스터 감독이 ‘8번 2루수 조성환’이라고 하는 순간 또 하나의 걱정을 덜었다. 로이스터 감독이 전적으로 나를 믿어줬기 때문에 온전히 야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 로이스터 감독 시절 개인적인 전성기도 누렸고, 팀도 잘 나갔다.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들일 것 같다.
조성환 “사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신인 때지만, 야구를 즐겁게 했던 시간은 로이스터 감독님과 함께했을 때다. 당시 로이스터 감독이 부임한 첫해 스프링캠프 내내 우리에게 ‘우리는 개막전에서 상대팀을 박살 낼 것이다’고 주입시켰다. 그때만 해도 선수들이 ‘우리는 개막전만 하는 게 아니라 100경기 넘게 뛰어야하는데, 왜 맨 날 개막전만 얘기하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얘기가 ‘시작부터 책임감을 갖고 임하라’는 메시지였다. 실제 로이스터 감독 시절 훈련을 평소에 10분의 1 수준으로 했지만, 선수들의 집중력이 상당히 뛰어났다. 결국 2008년에 개막전에 한화 류현진을 상대로 승리했고, 그 시리즈를 위닝시리즈로 마감했다. 당시에 타석에 들어서는 선수들의 눈빛을 보면서 나조차도 깜짝 놀랐었다. 그때는 정말 야구장에 나가는 것이 즐거웠다.”
- 평소 선후배를 잘 챙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나 故임수혁에게 남다른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조성환 “수혁이 형이 쓰러질 당시 내가 타석에 있었다. 쓰러진 것을 보고 머리로는 몇 번이고 형에게 달려갔는데 다리가 움직이지를 않더라. 그만큼 내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 일이 있고 꿈에 그 일이 몇 번 나왔는데, 그때마다 나는 형에게 달려가서 심폐소생술을 한다. 그때 달려가지 못한 게 마음에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만큼 내게는 힘든 기억이기도 하다. 형이 내 룸메이트였는데, 늘 심부전약을 챙겨드리면서도 담배 심부름을 했다. 지금 보면 참 아이러니했던 것이다.”
- 이후 준우승만 2번(1995년‧1999년) 하고 떠난 故임수혁을 위해 ‘우승’을 약속하기도 했다. 은퇴할 때까지 약속을 지키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클 것 같다.
조성환 “우승 얘기만 나오면 작아지는 것 같다. 팬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크고 스스로도 아쉬운 점이 많다. 안에 있을 때에는 ‘정말 우승하기 힘들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은퇴하고 밖에 나와서 보니 또 별거 아니더라. 모든 선수들이 뭉쳐서 정규시즌을 어떻게 할 수 있는데, 포스트시즌에는 선수들 외에 구단의 영향력과 전력 분석 등 부수적인 요인들이 필요하다. 결국 우승을 하기 위해 프런트, 벤치, 선수단의 마음과 힘이 한데로 모아져야하는데, 그 점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