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다옹] NC 초대주장 김동건, '성공보다 값진 도전'
16.08.16 13:52
'에드먼턴 키즈' '2차 1라운드 전체 1순위 SK 지명' 'NC 초대주장'
김동건 경찰청 수비코치를 대변하는 수식어다. 화려했던 타이틀 속 김동건 코치는 프로무대에서 ‘성공’이라는 타이틀을 얻진 못했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도전했다.
김동건 코치는 지난 2000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제19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다. 당시 주전 유격수로 뛰며 이대호(시애틀)와 추신수(텍사스), 정근우, 김태균(이상 한화)과 함께 팀의 주축으로 뛰었다. 이후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2차 1라운드 전체 1순위로 SK에 지명됐지만, 1‧2군을 오가다 2009년 말 방출통보를 받았다. SK에서 뛰었던 9년 동안 68경기서 1홈런 6타점‧타율 0.171의 초라한 기록만을 남기고 은퇴를 선택했다.
그라운드를 벗어나 살고자 했던 그는 야구를 떠나 살 수가 없었다. 결국 김동건 코치는 2011년 NC의 트라이아웃에 참가해 다시 유니폼을 입었다. 그곳에서 그는 NC 초대 주장직을 맡았다. 당시 김경문 NC 감독은 "(김동건이)어수선할 수 있는 신생팀을 잘 이끌어가고 있다. 대견하다. 동건이같이 아픔이 있는 선수들이 다시 빛을 봤으면 한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2013시즌 후 NC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 그때쯤 트라이아웃을 통해 NC에 입단했던 선수들 대부분이 팀을 떠났다. 선수로서의 김동건 코치의 도전은 끝이 났지만, 그는 그 속에서 성공보다 값진 것을 배웠다.
NC를 나온 그는 경찰청 수비코치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김 코치는 "선수로서는 성공한 인생을 살지 못했지만, 지도자로서는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 2001 신인 드래프트에서 2차 1라운드 전체 1순위로 SK에 지명됐다. 대개 지명 순위는 구단에서 선수에게 갖는 기대치라고 말하는데.
김동건 "구단뿐 아니라 스스로도 프로 무대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그때는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프로라는 곳이 기대감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더라. 신인 때 팔꿈치 연골이 많이 닳아 있는 상태였고, 염증도 있었다. 그러면서 잔부상이 많아지더라. 팀에서도 키워볼까 하면 아프고 야구를 해볼 만 하면 다시 또 아프고 해서 실망을 많이 했다. 그때는 스스로에게 화도 나더라."
- 결국 잔부상에 발목이 잡혔다는 얘긴데.
김동건 "이미 각 포지션에 자리를 잡고 있는 선수들을 내 힘과 능력으로 이겨야만 내 자리가 생기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걸 이겨내기 위해 늘 ‘더더더’ 하다 보니 오버페이스가 되더라. 또 부상이 지속되다 보니 지치기도 했다. 조금 좋아져서 하다가 안 되면 부딪치기보다 도망가기 급급했던 것 같다."
- SK에서 방출된 후 곧바로 그라운드로 돌아가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텐데.
김동건 "야구를 그만두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쉬었던 것 같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는 다시 야구를 시작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도 있었고, 뭐 먹고 살지도 고민이더라.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지인이 운영하는 야구 실내연습장에서 일하면서 사회인 야구를 시작했다. 다시 프로에 간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몸이 따라주지는 않았다."
- 프로 지명 순위와 성공 순위는 다른 것 같다. 앞선 순번으로 지명되고도 다양한 이유로 프로에서 성공하지 못한 케이스들이 많은데.
김동건 "나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나는 프로에 가서 힘든 순간에 도망쳤던 것 같다. 지쳤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앞선 순번일수록 구단에서 거는 기대가 크고, 그만큼 보여줘야 한다. 그게 안 되면 선수는 조급함이 들고, 그러다 보면 마음대로 되지 않은 야구에 지친다. 그럴 때 운동을 잠시 놓고 싶은 생각이 든다. 경험상 그때 쉬어가면 남들보다 5~6배는 쳐진다. 프로에 와서 지치지 말고 마라톤을 뛴다는 생각으로 야구를 했으면 좋겠다."
- 2000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추신수(텍사스)와 이대호(시애틀), 정근우, 김태균(이상 한화) 등과 함께 우승을 기록했다. 프로 입단 후 잘 나가는 동기들을 보며 기분이 묘했을 것 같다.
김동건 "당시 대회에서 1번 타자 겸 유격수 자리를 맡았었는데, 그때부터 다들 남다른 재능을 자랑했다. 같이 야구를 하는 입장에서 부러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쟤네는 잘나가는데 나는 왜 이렇게 안 풀리나.' '나는 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그들보다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 선수들은 그 위치에 갈 때까지 또 얼마나 노력을 했겠나. 그렇게 생각해 보면 억울할 것도 없다. 사실 나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정호다. 당시 대회 중에도 정호는 팀 훈련 후에도 (추)신수와 함께 개인 훈련까지 할 정도로 노력을 많이 했던 선수다. 프로에 와서 성공하지 못한 게 동기로서 안타깝다."
- 야구를 그만두고 1년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NC 트라이아웃에 도전하게 됐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 같은데.
김동건 "SK에서 방출된 후 그렇게 야구를 그렇게 그만둔다는 것 자체가 아쉬웠다. 종종 TV 화면 속에서 야구를 하고 있는 동기들이나 선후배들을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도 했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마음속에 야구에 대한 욕망이 여전했다. 그래도 생각만큼 트라이아웃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더라. 트라이아웃을 치르고 NC에 합류하면서 스스로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 NC 입단 후 그해 초대 주장직을 맡아 선수들을 아우르는 역할을 했다. 당시 김재현(한화 타격 코치) 선배 같은 주장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김동건 "프로 생활을 하면서 타이틀을 한 번도 달아본 적이 없다. 때문에 초대주장이라는 자리가 내게는 남다른 책임감으로 느껴졌다. 부족하지만, 팀 내에서 나이도 많고 그나마 경험이 있는 선수라 (김경문)감독님께서 선택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팀이 막 만들어진 단계여서 서로 잘해보자는 의욕이 넘쳤던 것 같다. 사실 주장으로서 크게 할 일도 없었다. 다만 나이 어린 선수들이 많기 때문에 경험적인 부분이나 정신적인 부분에 대해 얘기를 많이 나눴던 것으로 기억한다. NC라는 팀의 초대주장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영광이다."
- NC에 있으면서 구단 첫 백투백 홈런을 때려내기도 했다.
김동건 "팀을 나오고 나서는 무덤덤해지는 것들이 많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부분들도 많은데, 기록 하나가 남아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인 것 같다."
- 2013시즌 후 방출됐다. 본인을 비롯해 당시 트라이아웃을 통해 NC의 유니폼을 입었던 많은 선수가 팀을 떠났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 것도 같은데.
김동건 "NC팀 특성상 어린 선수들과 경쟁해야 하고,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20대 때와 같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몸이 생각만큼 따라주지 않더라. 2년간의 공백도 크게 느껴졌다. 그래도 NC에서의 마지막 도전 덕분에 후회를 남기지 않고 그라운드를 떠날 수 있었던 것 같다. 트라이아웃 때 만났던 선수들 모두 간절함이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봤던 후배들도 있었고, 야구 외에 다른 일을 하다가 온 선수들도 많았다. 나를 포함해 모두들 도전하는 모습은 아름다웠지만, 확실히 프로의 벽은 높았다. 어떤 일을 하던 다 잘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 쉽지 않은 도전에 나섰고,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했던 팀이기에 NC라는 팀이 특별하게 느껴질 것도 같다.
김동건 "NC는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나같이 방출의 아픔이 있는 선수들부터 다양한 사연을 가진 선수들이 함께했다. 많은 이들이 간절함 속에서 흘렸던 땀방울이 밑바탕에 있는 팀이다. 앞으로 더 승승장구했으면 좋겠다."
- NC에서 방출된 후 경찰청 야구단에 수비코치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지도자로서 나름의 철학이 있다면.
김동건 "야구선수로 생각했던 것만큼 성공하지 못했다. 지도자로는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목표가 있다. 경찰청을 거쳐 가는 선수들은 여기서 보내는 2년이라는 시간이 자신의 야구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되기를 바란다. 기술적인 부분의 기량향상도 있고, 정신적인 성장도 포함된다. 선수들에게 이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 줄 알기에 남다른 책임감을 갖게 된다. 아직은 부족하기에 유승안 감독님을 보고 많이 배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