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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다옹] 한화 유니폼 입은 김진영, '도전에 실패는 없다'

16.08.24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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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에 실패는 없다.”

 전 시카고 컵스 투수이자 2017 신인 드래프트에서 한화의 지명을 받은 김진영이 힘주어 말했다. 그는 “미국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도전을 했고, 내가 부족해 한국에 돌아왔다. 그걸 실패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도전 속에서 이미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도전하지 않았다면 배우지 못했을 것들”이라고 말했다.

 김진영은 지난 2011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미국에 진출해 많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그의 도전은 3년을 채우기도 전에 끝이 났다. 아버지의 건강상의 문제보다 미국 무대의 큰 벽을 깨기엔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고 공익근무요원으로 군 복무를 소화하며 KBO가 정한 ‘해외파 귀국선수 2년 유예기간’을 마쳤다. 국내 프로 무대 도전의 단꿈도 잠시, 자신이 임의탈퇴 신분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절차상의 문제로 인해 1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미국 도전을 마치고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지만, 그는 꾸준히 몸을 만들었다. 다시 올 기회를 잡기 위한 준비였다. 결국 김진영은 2017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한화의 유니폼을 입게 됐다. 김진영의 또 다른 도전이 시작된 셈이다.

 ‘야옹미인-김진영 편’은 2부로 나눠 연재된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김진영이 말하는 ‘도전’과 ‘실패’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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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화 입단을 축하한다. 드래프트 이후 여기저기서 축하 인사를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김진영  “옆에서 그동안 내가 고생한 것을 봐온 분들이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셨다. 사실 지명을 앞 순번에서 받는 것은 내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프로팀에 가서 야구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드래프트 전까지 초대를 못 받아서 드래프트 장에도 못 갈 뻔했는데, 다행히 뒤늦게 연락이 와서 갈 수 있었다. 굉장히 기뻤다.”

- 이번 드래프트에서 ‘해외 유턴파’들이 강세를 보였다. 아직까지 해외 유턴파들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 ‘잘 해야한다’는 부담감을 느끼지 않나.

김진영  “전체 1번이나 2차 1번의 경우 고등학생들이나 대학생들이 받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해외 유턴파들은 계약금을 받는 것도 아니라 순번에 대해서는 미안한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이번 년도에 뽑힌 모든 선수가 다 주인공 아니겠나. 순번과는 관계가 없는 부분이다. 사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해외 유턴파들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다. 마치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미국에 갔다가 실패하고 국내로 돌아왔다는 선입견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해외에 나가는 선수들 모두 도전을 하러 간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대한민국 야구 선수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뛴다. 국가대표는 아니지만, 한국인으로서 미국에서 도전을 한다는 것 자체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컵스에 있을 때에도 남미 애들이 워낙 공격적으로 굴었지만, 그때마다 내가 지면, 한국인을 우습게 볼 것이라는 생각에 물러서지 않았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와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모두 나와 같은 생각으로 도전을 했던 선수들이다. 결과가 좋지 못했지만, 다시 돌아온 선수들에게 돌은 던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김)성민이나 (신)진호 형이 야구를 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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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는 언제 시작했나.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능 같은 게 있었나.

김진영  “초등학교 4학년 때 살을 빼기 위해서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충남)대천 출신이라 한화의 골수 팬이시다. 야구를 워낙 좋아하셔서 다른 운동은 생각도 안하고 야구를 시켰다. 평소에 아버지께서 굉장히 엄하신데, 야구를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 때문에 집에서도 늘 야구로 시작해 야구로 끝났던 것 같다. 학교에서 운동을 마치고 집에 와서도 아버지 표 훈련을 소화해야했다. 당시 아버지가 콩 도매상을 하셨는데, 나를 뒷동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콩을 던져주시면서 방망이로 치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지만, 그때 집중력이 상당히 좋아졌다. 중학교 2학년 때에는 야구가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은 적도 있었다. 하루는 울면서 어머니한테 ‘야구하기 싫다’고 했더니 돌아오는 답이 너무 무덤덤했다. 어머니가 ‘진영아, 고생이 많다. 어서 유니폼 입고 나가’라고 하시더라. 늘 정신적으로 강한 어머니 덕분에 크면서 나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강해졌던 것 같다. 부모님의 정성과 좋은 가르침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야구를 할 수 있는 것 같다.”

- 덕수고를 선택한 것 자체가 미국 진출의 포석이었다고 들었다.

김진영  “당시 홍은중 야구부는 졸업 후 장충고를 가는 게 당연한 분위기였다. 나도 당연히 장충고를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동대문야구장으로 장충고 경기를 보러 갔는데, 덕수고에 있는 홍은중 선배가 오더니 당시 덕수고 코치였던 정윤진 감독님이 나를 보고 싶어 한다고 하더라. 따라가서 인사를 드렸더니 정윤진 감독님이 ‘우리 팀에서 너를 제 2의 류제국으로 만들어보고 싶다’고 하더라. 그 말에 덕수고를 선택했다. 어려서부터 메이저리그를 동경했기 때문에 꼭 도전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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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졸업 후 홀로 미국 도전이었다. 낯선 환경과 치열한 경쟁이 만만치 않게 느껴졌을 것 같다.

김진영  “루키로 스프링캠프에 합류했는데, 당시 싱글A와 더블A, 트리플A 까지 운동장 4개가 붙어있는 구조였다. 첫 날 트리플 구장에 140명 이상이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데, 동양인부터 라틴계, 백인, 흑인 등 다양한 인종의 선수들이 있더라. 거기에 코칭스태프만 해도 40명 정도가 됐다. 그 자체가 처음에는 충격적이었다. 루키 시즌 때 성적이 나쁘지 않아서 싱글A까지 올라갔지만, 잘하고 싶은 마음에 오버페이스를 하면서 스스로 무너졌다. 지금 생각해도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배움을 얻을 수도 있었다.”

- 아버지의 병환으로 인해 미국 도전을 포기했다는 얘기가 많았다.

김진영  “그건 아니다. 사실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게 속상하다. 아버지께서 몸이 안 좋으신 건 맞지만, 야구를 하는 것은 나다. 내가 부족했기 때문에 도전을 이어가지 못한 것이다. 누군가를 탓하고 싶지 않다. 아버지는 암 치료 5년이 지나셔서 완치 판정을 받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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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아쉬움이 컸을 것 같다. 도전 기간도 짧았는데.

김진영  “나는 내 도전에 ‘실패’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아마 나뿐 아니라 많은 해외 유턴파 선수들이 그럴 것이다. 좋은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도전도 하는 것이다. 나 또한 기회가 와서 미국에 갔다. 돈 욕심이 난다고 해서 미국에 갈 수는 없다. 도전은 도전만으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도전을 해야 결과를 얻는 것이고, 그 결과가 어떻든 배우는 것은 있다. 나도 미국에서 야구를 하고 남들이 말하는 ‘실패’라는 결과를 얻으면서 배운 것이 있다. 그거면 충분하다.”

- 진학을 앞둔 많은 학생들이 해외 진출에 대해 고민을 하기도 한다. 경험자로서 조언을 해준다면. 

김진영  “비록 나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전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도 다양하다. 국내에서 프로 경험을 하고 해외 진출을 할 수도 있고, 일찍 나가서 밑에서부터 올라가는 것도 방법이다. 선수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며, 선택에 후회가 없으면 된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실패’나 ‘성공’보다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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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돌아온 후 수술과 군 복무를 마쳤지만, 신분상의 문제로 1년을 더 쉬어야 했다. 힘든 시간이었을 것 같다.

김진영  “2014년 12월에 내 신분을 알았다. 임의탈퇴로 묶여있다는 것을. KBO에 문의를 해보니 2015년 1월 30일까지 방출이 되지 않으면 2018년 드래프트에 참가해야 한다고 하더라. 마음이 급해졌다. 지금은 해설을 하고 있는 성민규 코치님께 연락을 해서 구단에 문의를 했다. 내가 계약을 파기하는 것이라 컵스쪽에서 위약금을 물어야한다고 했다. 결국 위약금을 물어주고 기한 만료까지 이틀 남겨둔 1월 28일에 최종 방출 통보를 받았다. 방출 통보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전까지 잠도 못자면서 마음 졸였는데, 성 코치님 덕에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후 위약금 때문에 대출 받은 돈을 갚기 위해서 주중에는 공익으로 활동하고 군복무 하는 곳에서 겸직허가서를 받아서 주말에는 새벽 5시부터 밤 11시 까지 일을 했다. 힘들긴 했어도 지난 3년이라는 시간이 내게는 좋은 추억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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