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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비하인드] 최초의 아이돌이자 원조 망나니, 막장 스타였던, 프랭크 시나트라

18.03.02 17:23


할리우드와 미국을 비롯한 20세기 대중 문화 역사에 한획을 그은 원조 아이돌 스타였던 프랭크 시나트라와 관련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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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프랜시스 앨버트 시나트라 (Francis Albert Sinatra)
생년월일: 1915년 12월 2일~1998년 5월 14일
출생지: 미국 뉴저지 주 호보컨

1. 이민자 출신 그리고 마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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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프랭크 시나트라를 뿌리 깊은 백인으로 알고 있으나, 시나트라는 1915년 뉴저지주 호보켄에서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유년기를 보낸 호보켄은 작은 이탈리아로 불리는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거주지였다. 부모님은 술집을 운영했고, 금주법이 유행하던 시기라, 술장사가 안되자 마피아 조직과 결탁해 주류 밀매 활동을 해야 했다. 집안의 생계가 술집에 몰려있던 탓에 어린 시나트라는 어렸을 때부터 범죄 문화와 폭력적인 세계를 미리 보게 되었고, 이는 곧 이후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2. 방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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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와의 거래로 풍족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술집에서 만난 마피아, 범죄 조직의 영향으로 인해 학교에서 문제아가 될 수밖에 없었다. 폭력, 좀도둑질을 반복해 지속적인 사고를 치다가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중퇴를 당하기에 이른다. 


3. 음악인의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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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부모님의 가게에서 일하던 시나트라는 좁은 동네를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장래 희망으로 가수가 되겠다고 결심하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인해 결국 집에서 쫓겨나게 되고, 무작정 음악인들이 모여산다는 뉴욕 52번가의 클럽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빌리 홀리데이, 토미 도시, 베니 굿맨 등의 유명한 가수들의 공연을 보게 되고, 그들과 같은 음악인이 될 것임을 다짐하게 된다. 


4. 원조 아이돌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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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시나트라는 1935년 스리 플래시즈라는 지역 밴드의 멤버를 시작으로 꾸준하게 음악 활동을 해오다 1940년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손꼽히는 콘서트홀이자 영화관인 파라마운트에서 공연하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잘생긴 외모에 미성의 목소리를 지닌 탓에 그이 공연에 유례없는 여성 인파가 극장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결국 일주일 예정된 공연은 한 달, 두 달 연장되었다. 시나트라가 무대에 입장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객석의 소녀들이 목청이 터지라 소리를 질렀고, 급기야는 졸도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는 곧 시나트라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고, 1942년 즈음에는 미국인의 우상이자 존경받는 가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한 당시 시나트라의 별명은  ‘졸도 유발의 황제’ ‘수백만을 전율시키는 목소리' 였다. 


5. 록을 비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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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중반 비틀즈를 필두로 한 록, 로큰롤 음악이 대중 음악계에 침투하게 되자, 시나트라가 위치한 스탠다드 팝의 인기가 위기를 맞게 된다. 시나트라는 곧바로 록 음악의 침투를 막기위해 록음악의 비판의 선봉장으로 나서게 되고, 1958년 의회 연단에 등장해 "록 음악과 로큰롤은 가장 야수적이고 절망적이고 추하며 사악한 표현양식이다" 라고 선언하며 록 음악의 폐해를 전했다. 하지만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를 비롯한 수많은 록밴드 뮤지션들의 반격과 대중적인 위세에 결국 눌리게 되어 입장을 수정하게 된다. 급기야 1960년에는 군복무를 마치고 귀향한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를 대대적으로 환영하기 위해 나섰다.


6. 5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한 관록의 영화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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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와 동시에 영화배우로도 활발하게 활동한 엔터테이너로 유명하다. 1953년 출연작 <지상에서 영원으로>를 통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수상과 <황금 팔을 가진 사나이>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을 정도로 연기력도 출중했다. 이밖에도 <상류사회><잊을 수 없는 모정><탈주 특급> 등의 50여 편이 넘는 작품들에 출연해 흥행 배우로서의 인지도를 넓히게 되었다. 


7. 정치 활동... 진보주의자에서 보수주의자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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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활동에 있어서 죽을 때까지 우여곡절의 과정이 있었다. 마피아와의 친분과 같은 이민자 출신인 이탈리아와 아일랜드 출신 정치인을 지지하다가 매카시 상원의원이 주도한 매카시즘 운동의 표적이 되기도 했으며, FBI의 에드거 후버 국장으로부터 주요 감시 대상이 되어야 했다. 이 때문에 시나트라는 정치인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깨달았고 이를 위해 유력 대통령 후보들의 후원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초창기에는 민주당 루스벨트 대통령을 비롯해 존 F. 케네디 선거에도 적극 후원에 나섰을 정도로 정치적 성향은  진보주의에 가까웠다. 그러다 70년대 후반 들어서는 로널드 레이건과 같은 보수적인 정치인의 편에서며 죽을 때 까지 평생 레이건의 지지자로 남게 되었다. 


8. 그의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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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시나트라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있어 가장 빼놓을 수 없는 건 역시나 여자관계. 인기 많은 원조 아이돌이었던 만큼, 여자관계를 비롯한 결혼 생활 또한 매우 복잡했다. 모두 4번의 결혼 생활을 해왔다. 1939년 낸시 바바라와 첫 결혼을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세 아이가 있었으며 1951년 이혼했다. 1951년 당시 35세의 프랭크 시나트라는 29세의 영화배우 에바 가드너와 결혼했고, 에바 가드너는 그의 두 번째 아내가 됐다. 시나트라는 6년간의 결혼생활 끝에 1957년 에바 가드너와도 이혼하고, 1968년 영화배우 미아 패로우와 결혼했으나, 얼마 안 가 이혼하게 된다. 공통된 이혼 사유에는 역시나 성격 차이, 폭력 그리고 프랭크 시나트라의 바람기였다. 시나트라의 마지막 결혼은 1976년 가수 출신인 바바라 브레이클리와의 결혼이었으며, 시나트라가 1998년 사망할 때까지 함께한 여성이었다. 


9. "<대부>의 모델이 그였다?" 마피아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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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시나트라가 죽은 뒤에도 평생 그를 따라 다니는 꼬리표중 대표적인 사례로 마피아와의 관계설이 있었다. 

영화 [대부](1972)의 한 장면. 돈 코르네오네(말론 브란도) 앞에 가수이자 배우인 조니 폰테인(알 마르티노)이 울면서 자신의 영화 출연 무산에 대해 하소연한다. 이후 코르네오네는 조니를 위해 부하를 보내 영화 제작자에게 그 유명한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하게 된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범죄 조직과 손잡은 비열한 엔터테이너인 조니 폰테인은 1940~50년대 당대의 스타 프랭크 시나트라를 모델로 했다는 설은 유명하다. 마피아와 시나트라의 연계설은 잘나가는 그의 행보에 족쇄가 되었고 시나트라는 이러한 의혹을 여러 번 부인했으나 사람들은 그의 해명을 믿지 않았다. 

전자에서 언급한 듯이 시나트라의 집안은 마피아와의 거래를 통해 발전할 수 있었고, 그의 친한 고향 친구들 중에는 유명 마피아로 성장한 이들도 있었다. 한때 쿠바 아바나에서 열린 마피아들의 회합 때 루치아노와 같은 갱 두목들을 만난 것으로 알려져 1950년 12월 미국 상원 위원회의 마피아 사건 조사 때 관련 진술을 요청받기도 했다. 진술 청취는 그의 유명세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법조인 사무실에서 새벽에 이뤄졌는데 그때 시나트라는 줄담배를 피우며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마피아들과 우연히 만났을 뿐이며 가벼운 인사 정도만 나눴다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그는 무혐의로 풀려나게 되었으나 그의 외삼촌들이 유명 마피아 조직과 연루된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서 곤혹을 치러야만 했다. 


10. 아들 유괴사건이 그에게 남긴 후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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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가장이 된 시나트라에게는 매우 특이한 버릇이 있었는데, 바로 10센트짜리 동정 50개 묶음을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시나트라의 아들인 프랭크 시나트라 주니어가 어렸을적 유괴당한적이 있었는데, 유괴범이 시나트라와 교섭할 당시 공중전화를 쓰도록 요구해, 공중전화로 통화를 시도하던 중 동전이 떨어져 낭패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아이는 무사히 풀려났고, 유괴범들은 잡히게 되었지만, 아찔한 경험을 한 탓에 항상 10센트 동전들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비록 망나니 인생을 살아왔지만, 아이들에게만큼은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던 그였다. 


11. 혼인빙자 간음죄가 남긴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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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 끊이지 않았던 사생활 탓에 여성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무례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여성에게는 폭력을 행사했고, 성적인 비하 발언도 서슴지 않게 퍼부을 정도였다.  1938년 23세의 나이로 FBI에게 체포되던 사건도 바로 여자 문제였다. 당시 시나트라는 혼인빙자 간음죄로 체포되는데, 우연히 알게 된 여성과 만남을 가진 후 결혼을 빌미로 관계를 가진 뒤 바로 도주를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게다가 문제의 여성이 하필 유부녀였다는 사실이 큰 파문을 불러왔다. 사건은 관련 법안 개정과 증거 불충분으로 운 좋게 일단락되었으나, (피해 여성이 임신을 주장했으나, 수사 과정에서 해당 여성의 무고가 밝혀졌다.) 체포 당시 찍힌 문제의 머그샷 사진은 그가 죽은 이후에도 여러 인터넷 사이트를 떠돌고 있을 정도로 그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다. 일생의 평판이 죽어서도 영원히 남겨질 족쇄가 되어버린 것이다. 


12. 마릴린 먼로와의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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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와의 스캔들도 유명하다. 유명 스타인 만큼 친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명확하지 않은 관계 탓에 두 번의 루머가 전해진 바 있다. 하나는 두 사람이 섹스 파트너로 자주 만나 지속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설이며, 또 하나는 시나트라가 케네디 형제와 친분을 유지하기 위해 마릴린 먼로와의 만남을 주선해 줬다는 내용이었다. 두 루머와 관련한 증거들이 속속들이 전해진 바 있지만, 후자의 경우 마릴린 먼로가 사망한 뒤 무수한 뒷이야기를 남기게 되면서, 시나트라가 마릴린 먼로를 죽게만든 원인이었다는 오해를 사게 되었다. 물론 진실은 프랭크 시나트라 본인만이 알고 있지만...


13 여배우, 기자 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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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들은 언제나 할리우드의 여배우들 사이에서 나왔다. 여러 여성들을 만난만큼, 그들을 대하는 태도도 매우 무례했다. 자신에게 반항하거나 말을 무시하는 여배우들과 후배들에게는 주먹질을 가하고, 협박한 것으로 유명했다. 이러한 행동이 그의 마피아와의 연계설을 더욱 부추기게 만들었다. 정점은 이러한 의혹을 제기한 기자들을 향해 직접 주먹질을 가하게 되면서 찍게 되었다. 한 공식 행사에 참석하던 도중 자신에 관해 가십 기사를 쏟아내던 기자 모티머와 마주치게 되자, 분을 참지 못하고 곧바로 주먹질을 가한 사건은 매우 유명하다. 이 사건은 당시 거금인 9천 달러의 합의금으로 마무리되었다. 


14. 영원한 '적'이자 라이벌인 존 웨인과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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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영화 스타 존 웨인과는 영화 작업에 있어 라이벌로 불리게 되었는데, 실제로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었는데, 영화 촬영을 위해 라스베이거스의 호텔에 머문 존 웨인이 잠을 자던 중 호텔 객실의 바로 아랫방에서 벌어지던 시끄러운 파티소리에 잠을 깨게 된다. 알고 보니 문제의 방에서 파티를 주최한 이가 바로 프랭크 시나트라였다. 존 웨인은 문제의 객실에 전화를 해 조용히 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소용이 없자 결국 직접 내려가 시나트라에게 화를 내며 조용히 해달라고 소리쳤다. 이때 덩치 큰 시나트라의 경호원이 존 웨인에게 다가와 "그 누구도 시나트라 씨에게 그렇게 말할 수 없다"라고 위협한다. 화가 난 존 웨인이 옆에 있는 의자로 경호원을 가격해 쓰러뜨렸고, 그 후 호텔은 조용해졌다고 한다. 


15. 그를 살려준 인생작 <지상에서 영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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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존 웨인은 인생 최악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두 번째 아내 에바 가드너와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은 데다가, 공산당, 마피아와의 연계설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으며, 로큰롤을 필두로한 신예 뮤지션들의 등장으로 그의 활동 범위마저 좁아졌다. 그런 상황에서 계약사였던 콜럼비아가 그와의 일방적인 계약 파기를 선언했고, 그와 관련한 모든 쇼비즈니스 사업이 줄줄이 파기되어야만 했다. 그런 그의 유일한 희망은 바로 영화 출연이었다. 가요계에서 한물간 스타가 되었지만, 연기를 통해서라면 충분히 명예를 회복하고도 남았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1953년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에 마지오 이병으로 출연해 재기에 성공하게 된다. 노래만 잘하던 아이돌 스타라는 인식을 벗어나게 해줄 명연기를 펼치게 되었고, 이듬해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그에게 남우조연상을 선물하게 된다. 이 영화를 통해 프랭크 시나트라는 한동안 막혀있었던 쇼비즈니스 사업을 다시 재개할 수 있었다. 

16. 영화감독도 했어요...그런데 망했어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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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연기에 자신감이 생긴 그는 1960년대 중반에 영화 감독에 도전하게 된다. 1965년 작품 <None But the Brave>가 바로 그 작품. 그가 자주 출연했던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로 일본 영화 제작사가 합작 투자를 한 미일 합작 영화였다. 이 때문에 일본도 전쟁의 피해자라는 인식을 전해주게 되었는데, 보기 좋게 흥행에 실패하게 된다. 이때의 일을 교훈 삼아 시나트라는 더이상 연출 분야에 도전하지 않았다. 


17. 명곡 'My Way' 탄생 비하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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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의 프랭크 시나트라는 54세의 나이로 지속된 이혼과 영화 사업 실패로 연예계 은퇴를 생각하게 되었다. 지속되는 그의 슬럼프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후배 가수 폴 앵카는 선배에게  'My Way'를 건내게 되었는데, 시나트라는 이 음악이 자신의 인생과 같다고 느끼며 폴 앵커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발표 당시 빌보드 차트 20위권에 머물렀던 노래였으나, 수많은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주며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여러 뮤지션이 리메이크를 하게 되면서 불후의 명곡으로 남게 되었다. 그의 사후에도 불려지게 된 영원한 명곡이었지만, 마피아와 결탁설과 각종 스탠들 탓에 펑크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가 이를 펑크 버전의 거친 가사로 리메이크하며 조롱했다. 원곡이 자신의 거친 삶을 아름답게 돌아봤다면, 섹스 피스톨즈의 리메이크는 내 인생 내 마음대로 망나니 처럼 살았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18. 그의 마지막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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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의 엔터테이너이자 말도 많았던 스캔들 메이커였던 그는 1998년 5월 14일 LA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된다. 죽기 직전 남긴 마지막 유언은 "I'm losing" 이었다고 한다. 서류상 유언으로는 유산의 일부를 학대받는 아동들을 위한 기금에 사용하라는 것이었는데, 살아생전 여성들과 기자들에게 가했던 폭력 전과와 나탈리 우드와 같은 미성년자 연예인과 성관계를 맺었던 전력을 생각해 본다면 어느 정도 사죄의 의미가 담긴 유언이 아니었을까?

자료참조: 위키피디아, IMDB 트라비아, mentalfloss.com, pbs.org


최재필 기자 (보도자료/제휴 문의/오타 신고) movierising@hris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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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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