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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비하인드] 마약, 막장남편에 무너진 전설 휘트니 휴스턴

18.08.24 16:35


팝의 여왕이자 영화 출연으로 할리우드를 뒤흔들었던 90년대 최고의 인기스타 故 휘트니 휴스턴. 최근 그녀를 돌아보는 다큐멘터리 <휘트니>가 개봉하였고, 9월에는 그녀가 출연한 영화 <보디가드>가 재개봉될 예정이다. 다시 찾아올 전설적인 스타였던 그녀의 업적과 슬픈 비하인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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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휘트니 엘리자베스 휴스턴 (Whitney Elizabeth Houston)
출생-사망: 1963년 8월 9일~2012년 2월 11일
신장: 168cm
출생지: 뉴저지 주 뉴어크

1. 뮤지션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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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시절 모델로도 활약했던 휘트니 휴스턴의 잡지 사진

어머니가 가스펠 가수인 씨씨 휴스턴이며 사촌인 디온 워윅, 그리고 그녀의 대모는 '전설의 가창력' 아레사 프랭클린 이었다. 사촌 형제들도 가수인 뮤지션 집안 혈통이다. 어린 휘트니는 어머니 씨씨 휴스턴의 공연 때 코러스로 참여하게 되었고, 당시 공연장을 방문한 음반 기획자이자 프로듀서인 클라이브 데이비스 눈에 들어서 데뷔했다.


2. 성공적인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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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인 1집 을 내놓는다. 앨범 제작에만 2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제작비만 40만 달러가 들어간 대형 프로젝트였다. 그만큼 스튜디오가 어린 휘트니 휴스턴의 가능성을 눈여겨 본 것. 데뷔음반은 초반에는 부진했지만, 싱글곡인 You Give Good Love 3위, Saving All My Love for You 1위, Greatest Love of All 1위, How Will I Know 1위의 연이은 히트를 치게 되자 뒤늦게 입소문이 펴지면서 빌보드 차트에서 14주동안이나 1위를 차지하게 된다. 미국 내 총판 1000만 장 및 월드와이드 2500만 장이 넘게 팔리면서 여자 가수 데뷔 음반 최고판매기록을 경신했다. 그녀의 성공적인 데뷔는 당시까지만 해도 흑인 여성 솔로 가수에 대해 냉담했던 빌보드의 인식을 깼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었다. 

▲How Will I Know 뮤직비디오


3. 마이클 잭슨, 마돈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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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과 함께. 두 사람은 매우 절친했으며 서로의 외로움을 잘 이해했다

1987년 2집 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로 데뷔해 총 11주간 정상에 머물렀으며 4곡의 빌보드 1위 곡과 월드와이드 합산 210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리고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쪽에서도 대히트해 휘트니 휴스턴을 명실상부한 월드 스타의 반열에 올리게 되었다. 이때의 성공으로 휘트니 휴스턴은 마이클 잭슨의 뒤를 이어 마돈나, 프린스와 함께 대표 가수로 자리매김하며 8, 90년대를 대표하는 팝스타로 성장하게 되었다. 


4.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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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집 당시 휘트니는 다분히 백인 취향의 음악만 한다는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휘트니 휴스턴의 창법은 백인 취향 어덜트 컨템포러리 팝에 가까웠으며, 그에 맞춰진 마케팅을 펼치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989년 대표적 흑인음악 시상식인 소울트레인 어워드에서 후보로 휘트니 휴스턴을 지명하자 관객들이 일제히 야유를 터트렸다. 휘트니 휴스턴도 그러한 비판이 부담스러웠는지 3집에서 알앤비 소울, 뉴잭스윙 등의 흑인음악 트렌드를 반영한 곡들을 작업하게 된다. 앨범 판매는 2집에 비해 크게 미치지 못했으나, 흑인 사회에 큰 응원을 받게 되며, 비판을 찬사로 바꾸기에 이른다. 


5. 전설로 남겨진 슈퍼볼 국가 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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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걸프전의 여파로 미국 전역에서 애국 분위기가 강조된 시기. 미식축구 NFL의 결승전 '슈퍼볼'이 열리게 되었고, 휘트니 휴스턴은 경기전 미국 국가인 'The Star-Spangled Banner'를 부르게 되었다. 이때의 라이브는 역대 국가 제창 행사 중 전설로 남게 되었는데, 휘트니 휴스턴을 위해 당시 편곡을 담당하던 작곡가가 기존의 3/4 박자에서 4/4 박자로 편곡해 더 곱씹어 의미를 담아 부를 수 있게 바꿨고, 가스펠 풍의 편곡으로 분위기를 완전히 다르게 만들었다. 휘트니의 장점인 가창력과 가성 애드립이 돋보인 이 국가 연주는 국가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완전히 바꿔놓게 되었고, 이후부터 모든 여가수들이 미국 국가를 부를 때 무조건 휘트니의 버전을 참고하게 되었다. 당시 모든 미국인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남긴 이 곡은 2001년 9.11 테러 발생 이후 빌보드 Hot 100 7위로 치고 올라가는 기염을 토하기에 이른다. 

▲전설로 남겨진 휘트니 휴스턴의 국가 제창


6. 흑인 사회에 대한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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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국 국가인 'The Star-Spangled Banner'는 흑인들에게 있어 매우 꺼려질 수밖에 없는 곡이었다. 국가가 만들어진 시기와 가사의 배경이 인종 차별과 미국 노예제도의 영향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국가를 흑인 디바가 미국을 대표해 불렀으니 흑인들에게 있어서 이 곡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게 되었고, 그녀의 제창이 자랑스러운 순간으로 비치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녀의 곡들이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차트 1위를 연달아 차지하게 되면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흑인들에 대한 시선과 인식이 절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휘트니 휴스턴이 적극적으로 흑인 인권운동에 나서지 않았다는 의견과 달리, 그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반(反)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의 열성적인 지지자였다. 가수 데뷔 전 모델 활동 시기부터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펼치던 남아공과 거래하는 에이전시와는 계약하지 않았으며, 1988년 6월 11일, Moment of Truth World Tour 유럽 일정 중에 그녀는 다른 음악인들과 함께 당시 투옥 중이었던 넬슨 만델라의 7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자선 콘서트에 참여했다. 그해 8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흑인연합장학재단(United Negro College Fund)을 위한 콘서트를 열어 25만 달러를 모아 기부했다.

1994년 10월, 휴스턴은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된 넬슨 만델라의 미국 방문을 기념하는 백악관 만찬에 공연자로 참석하여 "Love's in Need of Love Today", "People", "Greatest Love of All" 과 같은 곡들을 불렀다. 1994년 11월, 그녀는 넬슨 만델라의 대통령 선출을 기념하기 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세 개 도시에서 Whitney - The Concert for a New South Africa로 이름 붙여진 세 번의 콘서트를 개최하며 2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인종 화합과 흑인들의 사회적 인식 변화에 크게 기여했다. 


7. 영원한 전설의 영화 <보디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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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되는 앨범 작업과 라이브 투어, 그리고 결혼 생활로 인해 이후의 가수 활동이 쉽지 않음을 느끼게 되면서 휘트니 휴스턴 본인도 변화를 꾀하려 했다. 그 변화는 다름 아닌 연기 도전이었고, 1992년 최고의 스타 케빈 코스트너와 함께한 <보디가드>가 그것이었다. 냉정하게 비평적인 부분에서는 그냥 그랬지만 흥행은 대박이었다. 당시 최고의 톱스타였던 케빈 코스트너에, 최고의 여가수인 휘트니 휴스턴이 나왔으니, 백인과 흑인을 상징한 톱스타가 연인으로 출연해 키스까지 한 장면은 그야말로 상징적인 의미로 담기에 충분했다. 영화는 2500만 달러로 제작돼 미국에서는 11월 추수감사절 연휴에 개봉하여 1억 2500만 달러를 벌어들인 것을 비롯, 전세계적으로 4억 119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리고 휘트니 휴스턴이 부른 사운드트랙은 세계적으로 4,200만 장 이상 팔리면서 기네스북에 오른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OST 기록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OST 최다 판매 기록인 1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특히 주제곡인 'I Will Always Love You'는 미국 빌보드 차트 1위를 14주나 차지했었으며,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레코드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보디가드>의 또다른 대표곡 'I Have Nothing'


8. 막장 남편 바비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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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인기 가수이자 댄서인 바비 브라운과 결혼하게 된다. 흑인들에게 인기 있었던 스타였던 그였기에 백인 흉내 내는 흑인 신데렐라 같던 휘트니의 이미지는 악동 남편을 만나면서 달라지게 되었다. 젊잖았던 휘트니 휴스턴은 바비 브라운과 어울리며 밝고 명랑한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고, 두 사람 사이에 바비 크리스티나 브라운이라는 귀여운 딸까지 탄생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두 사람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내인 휘트니가 만인의 연인으로 사랑받는 이미지였다면, 바비 브라운은 철없는 악동에 가까운 이미지였으며, 결혼 이후에도 지속적인 사고를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바비 본인도 무대에 서며 대중에게 나아가고 싶은 욕망이 컸으나, 결혼 이후 그에 대한 인식은 휘트니의 남편에 가까웠을 정도로 역할이 제한적이었다. 그 때문에 바비 브라운은 연일 타블로이드에 오를만한 사고들을 쳤으며, 휘트니는 이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정신없이 움직여야만 했으며, 결혼 생활 유지를 위해 남편을 달래고 바비의 이름이 담긴 영화사를 만들어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끊임없는 싸움이 지속되었고, 결국에는 바비 브라운의 알코올 중독, 외도, 폭력 그리고 마약 사건까지 발생하기에 이른다. 바비 브라운으로 부터 폭행까지 당했으나 끝까지 가정을 유지하려 했던 휴스턴은 그와 화해를 반복하다가 결국 함께 마약에 손을 대게 되었고, 그것이 그녀를 파멸로 이끈 지름길이 되고 말았다. 사실 휘트니 휴스턴이 마약에 손을 댄것은 가수로 데뷔하던 초기로 매니저였던 오빠들의 영향이 컸으나, 바비 브라운을 만나게 되면서 거의 중독자 수준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렇듯 부부 생활 유지보다 함께 마약에 빠져든 탓에 딸 바비 크리스티나 브라운의 육아는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고, 휘트니의 목소리와 건강상태는 완전히 망가지게 되었다. 결국 2007년 바비 브라운과 휘트니 휴스턴은 이혼하게 되었고, 휘트니 휴스턴 사망 이후 바비 브라운은 그녀를 망친 주범으로 몰리게 되었고, 그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도 매우 컸다. 


9.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머라이어 캐리와 함께한 <이집트 왕자>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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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승장구하는 휘트니 휴스턴을 견제하기 위해 소니 레코드의 토미 모톨라는 휘트니 휴스턴의 위대한 아성을 조금이라도 무너뜨리기 위해 브랜다 K. 스타의 백업 싱어로 일하고 있던 머라이어 캐리라는 보컬리스트를 발굴하고 데뷔시키게 된다. 가창력에서 뒤지지 않는 두 사람은 90년대 팝 음악 시장을 양분한 두 디바로 성장하게 된다. 당시 기획사와 언론, 팬덤은 두 사람의 라이벌 구도를 강화하기 위해 루머를 퍼뜨리며 경쟁했지만, 실제로는 매우 다정하고 친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1997년 두 디바는 합심해 애니메이션 <이집트 왕자>의 OST인 'When You Believe'를 내놓았다. 

▲<이집트 왕자>의 주제곡이자 머라이어 캐리와 함께 불러 화제가 된 'When You Believe'


10. 마약 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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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부터 살인적인 일정으로 인한 피로와 마약, 흡연으로 인한 자기 관리 실패에 성대결절을 앓게 된다. 그리고 여러 차례 임신을 했지만 유산의 고통까지 이어지게 되면서 휘트니 휴스턴은 마약에 더 의지하게 된다. 2002년 정규 5집 앨범 홍보를 위해 ABC 방송과 인터뷰를 진행하던 도중 루머로 전해진 마약 중독에 대해 일부 시인하게 되었고, 국민 디바가 중독자라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그녀에 대한 대중의 시선은 싸늘하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인터뷰 도중 "크랙은 싸구려야. 최악이라고" 한 말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는 크랙은 하류 계급이 사용하는 싸구려 마약이어서 자신같은 부자는 그런 것은 하지 않는다는 식의 해명이었기에 반감은 더욱 커질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한 여파로 인해 그녀의 5집 앨범은 상업적으로 크게 실패하였고, 여러 대중 매체에서는 그녀의 마약 중독과 문제의 발언을 패러디한 모습이 끊임없이 등장하며 그녀를 조롱했다. 


11. 침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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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실패와 더불어 자랑이었던 가창력과 목상태 마저 최악의 상태로 이어지게 되었다. 가수 활동을 지속하기 힘들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면서 2004년 휘트니 휴스턴은 바비 브라운과 함께 당시 유행한 가족 리얼리티쇼 'Being Bobby Brown'에 출연해 변신을 꾀하려 했는데, 문제는 가족 리얼리티가 화제성을 위해 '막장'에 가까운 자극적인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쇼에서 보여준 충격적인 모습에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게 되었다. 2007년 남편 바비 브라운과 이혼하고,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파산에 이르는 등 어려움을 겪어왔다. 재기를 위한 심기일전해서 2009년 정규 음반 6집 를 발표해 빌보드 1위를 차지하며 재기의 희망을 보이게 된다. 하지만 이어진 월드 투어에서 엉망이 된 가창력을 선보이게 되자 전세계 팬들에게 실망과 조롱을 안겨주게 되었고, 호주에서는 티켓 환불 소동까지 발생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12. 디바 영원히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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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11일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에 있는 베벌리 힐튼 호텔에서 숨진채 발견되었다. 이 날은 그래미 시상식 전날 축하파티가 있던 날로 파티 도중 발견되었으며 그래미 시상식 바로 전에 세상을 떠난 데다 시대를 풍미했던 디바의 씁쓸한 최후에 동료들은 물론 팬들도 큰 충격에 빠졌다. 흑인 최초의 '아메리칸 스윗하트'였던 그녀의 죽음에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는 슬픔으로 가득 찼고, 그 해 구글 검색어 1위는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녀의 사인은 익사였지만, 부검을 통해 밝혀진 정확한 사인은 마약이었다. 심장 마비의 일종인 심장 동맥 경화가 와서 욕조에 넘어져 익사했으며 심장 마비는 코카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결국 그녀를 망친 마약이 그녀의 목숨마저 앗아간 것이었다. 


13. 끝나지 않은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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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니 휴스턴이 사망한 지 3년 후인 2015년. 22살이 된 그녀의 딸 바비 크리스티나 브라운도 마약 과다복용에 빠지게 되고, 엄마와 똑같이 욕조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돼 뇌사상태에 이르게 된다. 부모의 마약 중독으로 인해 딸 마저 똑같이 중독의 길에 빠지게 되었고, 생부인 바비 브라운은 딸을 제대로 키우려 하기보다는 딸의 남편인 닉 고든과 싸움을 벌일기 일수였다. 결국 엄마 외에 그 누구의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했던 바비 크리스티나 브라운마저 2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14. 모두를 감동시킨 케빈 코스트너의 휘트니 휴스턴을 향한 추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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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휘트니 휴스턴의 장례식 날. <보디가드>에서 그녀와 함께 호흡을 맞춘 케빈 코스트너도 참석했다. 유족들의 요청으로 오게 된 그였지만, 그 또한 오래전부터 <보디가드>를 회상하며 "마기막 비행장 키스 신을 보면 누가 어떤 피부색을 가지고 있는지 잊어버리게 된다. 그게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라고 말하며 그녀와 함께한 순간들을 의미 있게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한 좋은 기억을 지니고 있었던 케빈은 휘트니 휴스턴을 향한 진심어린 추모사를 전하게 되고, 이는 곧 그녀를 향한 전세계 팬들의 마음을 대변한 감동의 추모사로 남겨지게 된다.

"눈물을 닦고 슬픔을 멈추고 가능하면 오랫동안 휘트니가 남긴 달콤한 기적을 기억합시다. 나는 한때 당신의 보디가드였지만 당신은 너무 빨리 가버렸습니다. 하지만 천국으로 가는 길에는 천사들이 보디가드가 되어 줄 것이며 신 앞에서 노래할 때도 당신은 충분히 잘할 것입니다"

▲<보디가드>의 주제곡 'I Will Always Love You'. 휘트니 휴스턴 사망후 추모 영상으로 활용되어 6억 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최재필 기자 (보도자료/제휴 문의/오타 신고) movierising@hrising.com

(사진=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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