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시] 리뷰: 당신의 내일은 안녕한가요
13.11.21 20:17
[열한시]
감독: 김현석
출연: 정재영, 최다니엘, 김옥빈 외
개봉: 2013년 11월 28일
여러분에게 '내일'이라는 시간은 어떤 의미인가요? 일반적인 직장인들에게 '내일'이란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서, 같은 길을 따라 출근을 하고, 같은 자리에서 업무를 보고 또 별다를 일 없이 퇴근하는 일상의 반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내일'을 그저 그런 보통 날로 치부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비틀어 생각해보면, '내일' 주어지는 24시간은 생각보다 더욱 엄청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가령 '내일' 당신은 무심코 출근길에 산 복권이 당첨되어 인생 역전을 이룰 수도 있고, 상사와의 갈등에 충동적으로 사직서를 던지고 나와버릴 수도 있으며, 퇴근길 지하철에서 평생의 반려자가 될 여성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내일' 생각지도 못했던 사고가 터져 출근길 발이 묶일 수도 있고 극단적으로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마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보통 날일 줄 알았던 '내일', 생각보다 엄청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그 '가능성'에서 영화 [열한시]는 시작됩니다.
러시아 심해 한가운데 위치한 타임머신 연구소의 크리스마스이브, 연구원 모두가 지상으로 휴가를 갈 수 있다는 것에 들떠있는 가운데 책임자인 우석(정재영 분)은 투자 기업으로부터 프로젝트의 중단을 통보받고 심란해합니다. 자칫 3년간의 연구 성과가 날아가 버릴 수도 있는 상황, 그는 연구 지속을 위해 지완(최다니엘 분)을 비롯한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영은(김옥빈 분)과 시간 이동 테스트를 감행합니다. 결과는 성공. 24시간 후인 크리스마스 오전 11시로의 이동에 성공한 이들은 시간 이동에 성공했다는 증거를 챙겨 다시 원래의 시점인 24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사라진 연구원들과 폐허가 된 기지. 25일 11시, 연구소는 출발 시각인 24일 11시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연구소 전 인원이 휴가를 떠나고 비어있어야 했을 크리스마스, 과연 밀폐된 그 공간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목격자는 단 하나, 24일부터 25일까지를 담고 있는 CCTV뿐입니다.
영화 [열한시]는 시간 이동으로 하루 뒤의 미래를 알게 된 우석과 팀원들이 이를 막기 위해 시간을 추적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이 목격한 미래는 '끔찍함' 그 자체입니다. 3년의 연구 실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연구소는 불길에 휩싸이고, 연구원들은 모두 끔찍한 죽음을 맞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결말을 먼저 알려주는 다소 직설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영화 시작 불과 30여 분만에 관객들은 CCTV를 통해 그들의 최후를 목격하게 됩니다. 즉, 대개 스릴러 영화 전개방식이 '기-승-전-결'으로 이어진다면 [열한시]는 25일이라는 미래의 상황을 통해 결말을 제시하고 그 사건의 원인과 경과를 찾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스릴러 영화의 생명인 '결말'을 미리 알려주며 자칫 단조로워질 수 있었던 영화를 살리는 것은 바로 탄탄한 스토리입니다. 등장인물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물론이요, 고장 난 기타와 종이 한 장에 이르기까지, 별 의미 없어 보였던 소품들이 사실은 사건을 풀 수 있는 열쇠라는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당황스러움과 충격이 이어집니다. [광식이 동생 광태], [시라노: 연애조작단] 등에서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었던 김현석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역시 탁월한 스토리로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습니다. 특히 후반부, 사건의 전말이 하나, 하나 공개되는 과정은 마치 100피스 짜리 퍼즐을 맞춰가며 그림을 완성하는 듯한 긴장감과 쾌감을 선사합니다.
사실 미래를 보고 예정된 미래를 바꾸려고 한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에서 쓰여왔던 주제입니다. 대표적으로는 8편의 속편을 낳은 [데스티네이션] 시리즈가 있습니다. 소재의 유사성은 피할 수 없으나 [데스티네이션] 시리즈와 [열한시]는 추구하는 바가 다릅니다. 가령 [데스티네이션]은 무리 중 단 한 명만이 운명적으로 다른 이들의 죽음을 내다봅니다. 즉, 죽음을 맞는 당사자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이지요. 그렇다 보니 [데스티네이션] 시리즈는 참혹한 죽음의 순간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춥니다. 반면 [열한시]는 시간여행과 CCTV라는 장치를 통해 7명의 팀원 모두가 자신들이 24시간 후 11시에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한마음으로 이겨내려고 했던 팀원들은 그러나, 25일 11시가 다가올수록 '나 하나만이라도 살자!'며 발버둥 칩니다. 당장 죽을 것으로 예견된 미래, 어떤 의미로는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던 이들의 갈등은 극에 달하고, 최소한의 윤리의식조차도 남지 않은 연구소는 말 그대로 '폐허'가 됩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우석의 변화입니다. 강인하고 굳건한 모습으로 연구소의 중심추 역할을 하던 그 역시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트라우마에 휩싸인 한낱 나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열한시]는 분명 잘 만든 스릴러 영화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많습니다. 기자간담회에서 김현석 감독은 국내 최초로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를 다룬 소감에 대한 질문에 '마음 먹은 데로 이야기를 전개하기 어려운 점이 힘들었다'라고 밝혔습니다. 감독이 우려했던바 처럼 타임머신이 등장하고 우석과 영은이 24시간 후로 이동하는 초반 20여 분은 CG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제작비나 제작 여건이 훨씬 좋지 않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비슷한 소재를 다룬 헐리웃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기술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CG의 문제보다 더 아쉽다고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영화의 제목입니다. 영화 제목은 관객들에게 호기심과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가장 간편하면서도 좋은 장치입니다. 김현석 감독은 [열한시]라는 제목이 투자사와 제작사가 고민해서 최종적으로 정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영화의 내용을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차라리 영화의 주제인 '시간 추적'이나 예측할 수 없는 내용을 더 포함하고 있는 제목이였다면 관객들의 눈길을 더욱 사로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모든 것은 '나비 효과'였을지도 모릅니다. 시작은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죠. 분명한 것은 이 영화에서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시간 여행'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정된 미래를 바꾸었을 수도 있고, 또 그렇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김현석 감독은 사소하지만 무서운 '내일'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죽음의 순간을 예측하고 있는 인간이 최소한의 정의마저 무너뜨리는 모습은 어쩌면 극단적인 상황에 부닥쳤을 때 우리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