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아라비아의 로렌스' 피터 오툴을 기억하며…

13.12.17 17:38

1999년 충무로의 대한극장을 지나가면서부터였다. 최신 영화가 걸려있어야 할 극장에 난데없이 5, 60년대 영화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그림 간판이 (지금은 사라진)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대한극장이 2000년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전환하기 위해 임시폐관을 결정하면서 이벤트 형식으로 추억의 시네마스코프 70mm 필름 영화들에 대한 재상영을 가진 것이었고, 간판 그림의 주인공인 잘생긴 백인 남성이 중동인들이 입는 전통 사막의상을 입은 채 칼을 들며 아랍인들을 지휘하는 모습이었다.

보통의 대서사시 영화에서나 볼법한 평범한 포스터라 생각했지만 동시에 '저 백인이 어떤 사람이길래 아랍인 들을 지휘하려는 것일까?' 라는 호기심이 생겼다. 뒤늦게야 그 영화가 [아라비아의 로렌스]였으며 아랍인의 단결을 위해 맞서 싸웠던 실제 주인공 토마스 로렌스 경의 활약상을 담은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막 영화를 좋아하게 된 10대 시절이었기에 고전영화라 하더라도 걸작이라면 무조건 챙겨봐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그때 당시 내가 조금의 정성과 생각이 있었다면 역사적인 70mm 영화의 마지막 상영에 참여하는 것이 더 큰 감동을 느낄수 있었지만, 우연치 않게 아버지가 녹화하시던 수백개의 TV 영화 테이프들에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있는 걸 확인하고 극장 상영 대신에 비디오 감상을 택한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정성스럽게(?) 녹화하신 비디오는 당시 MBC를 통해 방송된 영화라 그 당시 비디오 녹화의 결과는 저화질에 들릴까 말까하는 저음질의 성우 목소리였기에 감상에 있어서 최악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대작 영화라 하더라도 최악의 녹화 상태에서 인내심을 갖고 보기란 쉽지 않았기에 감상 방식 때문에 낭패를 본 아쉬움이 남았었다. 하지만 그 최악의 감상 상태 속에서도 영화속 주인공 로렌스는 이상하리 만큼 눈에 띄었다. 중동이라는 다른 세계, 문화권의 유일한 백인이라는 점과 그들과 다른 파란 눈동자 때문일수도 있지만 사막과 신이 정한 운명을 거부하고 자신이 꿈꿔온 이상을 이루기 위해 집요할 정도로 끈질기게 노력하고 광기적인 집착으로 변하는 그의 행동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세계의 역사를 바꾼 영웅이기에 앞서 그러한 목표를 위해 홀로 외로이 싸워가며 그 세계의 사람으로 살아간 로렌스의 인간성을 부각시키려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라는 것을 알게되었고 그러한 로렌스를 연기한 피터 오툴을 알게된 것도 그때였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오랜만에 듣게 된 것이 바로 이번 12월 15일 일요일 그의 타계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사실, 피터 오툴은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잠시나마 관심을 가졌을때 알게되었고 이후 그가 연기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었던 사실은 어렵사리 듣고 있었지만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의 타계 소식을 들으며 잠시나마 그의 출연작들을 살펴보다가 나도 모르게 "아 이 사람이 그 분 이였구나" 라는 탄성을 자아내었다. 나이가 들며 서서히 영화계의 주연 자리에 물러난 그는 조연과 단역 그리고 애니메이션 목소리 연기를 자처하며 활발한 연기활동을 하고 있었다. 세상이 그의 대표작인 [아라비아의 로렌스]만 기억하는것과 달리 그는 자신만이 기억할수 있는 그만의 기록을 만들어 나가고 싶었던 것이었다. 토마스 로렌스가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아랍의 역사를 바꿨듯이 모두가 그를 기억속에 잊고 있을 때 꿋꿋하게 자신만의 연기 인생을 지켜낸 피터 오툴은 이상을 꿈꾸는 '81세의 청년' 이었다. 이제는 그러한 이상을 향한 모험을 끝낸 그의 발자취를 우리가 함께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그가 출연한 수많은 작품중 명작 반열에 오른 작품과 국내팬들에게 익숙한 작품들만 선정했다.

1.아라비아의 로렌스 (1962)

감독: 데이비드 린
출연: 피터 오툴, 알렉 기네스, 안소니 퀸, 잭 호킨스

피터 오툴 개인에게도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잊기 힘든 작품이면서도 때로는 그러한 멍에에 벗어나고 싶은 작품이었을 것이다. 전세계 영화팬들은 이 작품으로 그를 알게 되었지만 그에 못지 않은 대표작에 출연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이후에도 막중했을 것이다.

그가 연기한 토머스 로렌스는 20세기 초반 등장한 이상가이자 몽상가 였으며 체게바라와 같이 민중의 힘으로 '제국'과 같은 거대한 힘에 맞서려는 혁명가 였으며, 터키 제국의 지배하에 있는 아랍 민중을 구하기 위해 외지인인 로렌스가 온갖 희생과 고난을 감수하게 되는 부분에서 그의 영웅적인 면모가 부각되었다. 하지만 세상을 바꿀 영웅이 이 낮선 땅에서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들을 이해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자신이 살았던 도시속 문명과 전혀다른 사막과 야생의 세계에 살아가는 아랍인들의 현실속에 들어와 그들의 문화를 체험하고 함께 생활 하면서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문명 사회에서 통하지 않는 신이 정한 '운명'의 굴레를 배우게 된다. 로렌스는 이러한 외지인 영웅이 낮선 세상의 일원으로 살아가며 영웅으로 성장하게 되는 가슴벅찬 이야기를 담은 대서사시 였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피터 오툴의 연기 이외에도 여러면에서 세계 영화사에 길이남을 명작이었다. 특히, 70mm 시네마 스코프에서만 느낄수 있는 광할한 대지와 사막의 영상미가 매우 인상적이다. 신기루 인줄 알았던 사막의 끝에서 또다른 주인공 오다 아부타이(안소니 퀸)가 낙타를 타며 다가오는 롱테이크는 70mm 필름에서만 느낄수 있었던 매우 특별한 진수였다. '로렌스' 피터 오툴의 타계로 이제는 더없이 전설로 남겨진 작품으로 기억되어질 것이다.

2.백만달러의 사랑(1966)

감독: 윌리엄 와일러
출연: 오드리 헵번, 피터 오툴

60년대 세계적인 '미(美)의 대명사' 오드리 헵번과 함께 출연한 로맨틱 코미디. 피터 오툴은 극중 강도로 위장한 형사로 등장해 자신이 체포해야할 위조예술가의 딸(오드리 헵번)과 아슬아슬한 사랑의 줄타기를 유지한다. 오툴은 전작과 다르게 가끔 코믹적인 면모와 위트있는 유머를 날리기도 하며 영화의 소재인 비너스를 흠치는 부분에서는 긴장과 스릴을 선보인다. 오툴과 헵번의 애뜻한 로맨스와 스릴러가 적절하게 섞인 수작이다.

3.겨울의 라이온(또다른 이름: 헨리 2세와 엘리노 여왕,1968)

감독: 안소니 하비
출연: 피터 오툴,케서린 헵번,안소니 홉킨스,티모시 달튼

영국 역사에 있어 가장 굴곡진 인생을 살아간 왕 헨리 2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사랑하는 아내의 배신에 호시탐탐 왕권을 노리는 아들들의 음모까지 눈치챈 그는 나라를 위해 피비린내 나는 냉혹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피터 오툴은 비운의 왕 '헨리 2세'로 분해 왕권을 지키기 위해 쉴새없이 아내와 아들들과 논쟁을 벌이고 급기야 전쟁도 불사하는 거팀없는 모습을 선보인다. 자신의 생존과 위엄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가족,핏줄들과 싸워야 하는 외로운 사자. 그것이 바로 왕의 모습이라는 것을 직접 보여주었다.

4.칼리귤라(1980)

감독: 틴토 브라스
출연: 말콤 맥도웰, 테레사 앤 사보이,헬렌 미렌,피터 오툴

性에 관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탐닉하는 틴토 브라스 감독의 대표작. 영화는 칼리귤라(말콤 맥도웰)의 온갖 향락과 타락 그리고 性에 대한 집착을 농도짙게 그려내며 수많은 논란과 화제를 낳았다. 피터 오툴은 이러한 칼리귤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로마의 황제 티벨리우스를 맡아 폭정의 끝을 보여주었다. 오툴의 눈빛은 '로렌스'의 그 선한눈이 의심될 정도로 너무나도 악해보였다.

5.스턴트맨(1980)

감독: 리차드 러쉬
출연: 피터 오툴, 스티브 레일스벅, 바바라 허쉬

베트남전에서 온갖 죽을 고비를 넘기며 복귀한 주인공이 제대후 생사를 넘너드는 스턴트 맨 세계에 빠져드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 피터 오툴은 '완벽한 작품'이라는 미명하에 주인공 카메론(스티브 레일스벅)에게 위험을 담보로 하는 스턴트를 강요하는 영화감독을 연기했다. 스턴트맨의 목숨은 중요치 않다는 듯이 멀쩡하게 자기일에 몰두하는 그의 모습은 창작의 욕구에 이성을 지배당한 괴물을 보여주었다.

6.마지막 황제(1987)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출연: 존 론, 조안 첸, 피터 오툴

설마 이 사람이 피터 오툴 이었나 의심했었는데, 역시나 맞았다. 오툴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존 론)의 외국인 가정교사 레지날드 존스톤을 분해 그에게 신문물을 알려주고 다정한 친구가 되어준다. 그리 긴 분량은 아니었지만 그가 있었을때 푸이는 친구를 만난것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영국인 특유의 위엄과 위트 그리고 아버지이자 친구처럼 푸이를 대해주는 모습이 인상적 이었다.

7.트로이(2004)

감독: 볼프강 페터슨
출연: 브래드 피트, 올랜도 블룸,에릭 바나,다이앤 크루거,피터 오툴

브래드 피트,올랜도 블룸,에릭 바나라는 걸출한 스타들을 탄생시킨 영화였지만, 피터 오툴은 이에 밀리지 않는 자신만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가 연기한 트로이의 왕 '프리아 모스'는 인자한 풍모와 인품을 겸비하면서 동시에 다정한 아버지 이기도 했다. 아킬레스(브래드 피트)에 의해 헥토르(에릭 바나)의 시신이 적진으로 끌려가자 아비된 마음으로 홀로 적진에 들어가 시신을 돌려줄 것을 울면서 요구하는 모습에 강인한 아킬레스는 감명을 받고 그에게 존경을 보이기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 이었다. 한 시대의 인기 배우가 선배격 배우에게 존경을 보내는 모습을 본것 같은 훈훈한 장면이기도 했다.

8.라따뚜이(2007)

감독: 브래드 버드
출연: 패튼 오스왈트, 루 로마노,이안 홈,피터 오툴

요리 잘하는 생쥐 '레미'의 활약상을 담은 유쾌한 픽사의 애니메이션. 이 작품이 단순한 아동용 애니메이션으로 끝나지 않을수 있었던 것은 음식을 먹고 심사하는 음식 비평가 '안톤 이고'라는 캐릭터가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비평가에 대한 이중적인 시선을 보여주며 풍자한 이 캐릭터는 깊은 인상을 남기며 오랫동안 많은 영화팬들 사이에서도 회자되고 있다. 바로 이 목소리를 담당한 주인공이 피터 오툴이었다. 오랫동안 주연 자리에서 벗어나 조연 단역 가리지 않고 활약한 그가 애니메이션 성우에도 도전했다는 점에서 의미있었다.

9.크리스마스 별장(2008)

감독: 마이클 캠퍼스
출연: 제러드 파달렉키, 마샤 게이 하든, 피터 오툴

'빛의 화가'라 불리우는 미국내 명성있는 화가 토마스 킨케이드의 이야기를 그린 실화 영화. 토마스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고향으로 내려왔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족들의 현실을 보고 마을의 벽화를 그리는 일을 맞게 되지만 쉽지 않은 상황. 이때 그의 정신적 지주이자 유명한 화가인 글렌(피터 오툴)이 나타나 그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켜 준다. 그로인해 토마스는 모든 이웃이 즐거워할 벽화를 완성하게 된다. 오랜만에 주연으로 출연한 피터 오툴은 가족영화에 출연해 크리스마스에 사람들에게 행복을 심어주게 되는 계기를 전해주는 메신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