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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성폭행, 마약, 부모의 방황에도 불구하고…' 힘든 성장기를 보낸 스타들 2부

16.07.1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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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성적 학대로 고통스러운 십대를 보낸 '애슐리 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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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미녀 배우 애슐리 쥬드는 유년기 부터 가난했다. 컨츄리 가수인 어머니와 언니가 생계를 책임졌지만,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탓에 전기, 수도, 전화도 없는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심지어 비누까지 만들어 써야 했으며, 식료품비를 아끼기 위해 채소를 길러야 했다. 남들과 같은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었던 시기는 그녀가 20살이 되던 해로, 어머니와 언니가 뒤늦게 성공한 때였다.  

하지만 십 대 시절 그녀의 시련은 가난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여자로서 감당하기 힘든 상처로, 15살 한 남자에게 두 번이나 강간을, 16살에는 다른 성인 남성에게 성추행을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가까운 친척에게까지 성적 학대를 받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러한 고난과 아픔을 대학 시절 공부와 연기에 대한 애정으로 극복하게 되었고, 지금의 헐리웃의 스타로 거듭날 수 있었다. 

2011년 자신의 불우했던 시절이 담긴 자서전을 출간할 당시 "내 책이 성적 학대를 겪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어 진실을 말할 힘을 갖길 바란다"고 말하며, 성적 학대로 고통받는 이들을 도우려 했다. 


총, 마약과 함께 십 대 시절을 보낸 '50 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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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퍼이자 배우인 그의 활동명 '50 센트'의 유례는 그 누구보다 불우하고 치열한 십 대 시절을 보낸 그의 성장기와 관련 있다. 1975년 뉴욕 퀸스 사우스 자메이카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커티스 제임스 잭슨 3세. 생모는 퀸스의 유명한 마약판매인 이었으며, 잭슨의 유년기에 라이벌 조직에 의해 살해당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십 대 시절부터 마약 판매일을 도왔으며, 총과 마약을 소지한 채로 학교를 오가고 해야 했다. 

유년기부터 십 대 시절까지 총과 마약에 의해 목숨을 위협받았던 그에게 랩은 삶의 낙이었고, 지옥 같은 일상을 벗어나게 해 줄 탈출구였다. 이지 이, 닥터 드레, 아이스 큐브와 같은 래퍼가 되고 싶었던 그는 1996년 친구와 함께 랩을 연마하며 꾸준히 활동하다 2000년 첫 앨범인 'Power Of the Dollar'를 발매하게 된다. 

래퍼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으며, 범죄와의 인연에 종지부를 찍는 새 삶을 꿈꾸던 찰 나, 2000년 5월 할머니 네 집으로 가던 도중 한 남자로부터 총격을 당하게 된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혀의 앞부분이 절단돼 일상 대화에서 혀짧은 목소리를 내야 하는 불편을 겪게 된다. 하지만 이 상처는 그만의 전매특허인 어눌한 랩 발음의 기원이 되고, 에미넴과 닥터 드레에게 큰 인상을 남겨, 그들로부터 백만 달러의 계약을 성사시키는 계기가 된다. 

50센트라는 활동명은 뉴욕의 유명한 범죄자 케빈 마틴의 별명에서 빌려왔다. 그와 같은 삶을 살았고, 어감이 좋다는 이유에서 이 예명을 차용했다고 한다. 

P.S: 성공한 래퍼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최근 과소비, 투자 실패, 법정 합의금 등의 악재가 겹치며 3600만 달러(한화 약 420억원)의 채무액을 지고 파산했다고 한다. 


망나니 아버지 때문에 힘든 시기를 겪어야 했던 '니키 미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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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에서 연기자로 활동 보폭을 넓히고 있는 니키 미나즈는 유년 시절을 고향인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보내다 5살 때 부모와 함께 미국 뉴욕으로 거주하게 된다. 하지만 뉴욕의 이민 생활에 지친 탓인지 그의 아버지는 마약과 술에 중독되었고, 그로 인한 화를 가족들 앞에 풀었다. 니키 미나즈는 끔찍했던 당시를 회상하며 "아버지가 집에 들어올 때마다 어머니와 우리 가족은 두려움 속에 살아야 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물리적, 언어적 폭력을 자행하며 우리에게 큰 상처를 안겨주었다."고 말했다.

가족에게 폭력과 욕설을 내뱉었던 아버지는 어느 날 미나즈와 오빠가 친구 집에 놀러 간 사이 홧김에 집에 불을 지르는 사고를 저지른다. 집이 불타는 와중에도 아버지는 불을 끌 시도도 하지 않았고, 집에 갇힌 어머니는 혼자 불을 끄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겨우 탈출해야 했다. 니키 미나즈에게 있어 지금도 그 순간은 악몽과도 같았다.


알코올 중독 부모들 때문에 스스로 성장해야 했던 '데미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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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 무어의 유년시절부터 십 대 시절까지의 성장기는 매우 험난했다. 아버지는 결혼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데미 무어를 임신한 채 새로운 남자와 재혼한다. 데미 무어의 시련은 바로 이 계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고정된 직장 없이 여러 직업을 바꾸고 그만둬야 했던 계부는 30번이 넘게 이사를 가야 했다. 여기에 수많은 도박 빚에 알코올 중독까지 갖고 있었으니, 집안은 가난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그녀의 어머니도 만만치 않은 알코올 중독자였다는 점. 그 때문에 어린 데미 무어의 성장기는 온전치 못했으며, 집안의 경제는 자신이 일으켜 세워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나마 집안이 어느 정도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데미 무어가 십 대 시절부터 모델 활동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이후 무어의 친모와 계부는 이혼과 만남을 반복하다 각기 다른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알코올 중독을 극복하지 못한 채 실패한 삶을 산 계부는 1980년 자동차 배기가스를 들이마시며 자살한다. 무어의 어머니 또 한 알코올 중독을 극복하지 못하고, 술에 빠져 살다 뇌종양에 걸려 1998년 5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아픈 과거를 그복한 성공의 상징 '오프라 원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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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과거의 아픔을 지니고 성공한 유명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오프라 윈프리가 되지 않을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자 20세기의 가장 부자인 흑인계 미국인으로 꼽힌 오프라 윈프리의 과거사는 그 누구보다 참담했다. 

1954년 오프라 윈프리는 미시시피 주의 한 시골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6살 때까지 할머니와 함께 살다가 이후 어머니와 같이 살게 됐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오프라에게 무관심했다. 그러다 잠시 테네시주에 있는 아버지에게 보내져 따스한 보살핌을 받기도 했지만, 다시 어머니와 살게 되면서 혼돈과 방황의 길로 빠져들게 된다.

9살에 사촌오빠로부터 성폭행을 당했고, 14살에 미혼모가 돼 아들을 낳게 되지만, 아들은 2주 후에 죽게 된다. 이후 다시 아버지와 살게 되면서 오프라는 차츰 안정을 찾게 되었고 고등학생 때부터 연극부와 토론 부에 들어가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아픈 과거를 극복하게 된다.

그 후 우연히 라디오 프로에서 일하게 되고 열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지역의 저녁 뉴스의 공동 진행자가 돼, 대학 4학년 때는 볼티모어의 방송국 뉴스 앵커로 데뷔한다. 하지만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진행이 문제로 인해 앵커에서 해임되고, 대신 방송국이 제안한 토크 쇼를 진행하게 된다. 

토크 쇼는 그 누구보다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감성적인 오프라 윈프리와 너무 잘 맞았으며, 능수능란한 진행 덕분에 토크 쇼는 큰 인기를 발휘하게 된다. 1983년 시카고에서 진행된 그녀의 아침 토크 쇼 '에이엠 시카고(AM Chicago)'는 얼마 되지 않아 시카고에서 가장 인기 있는 토크 쇼가 되었고 ,‘오프라 윈프리 쇼’로 이름을 바꾸어 전국적으로 방영돼 전미 최고의 토크 쇼로 자리잡게 된다.  

1991년 오프라는 토크 쇼에서 9살 때 성폭행당한 사실을 공유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해, 2년 뒤 빌 클린턴 정부가 아동 성폭행범의 신상정보를 국가가 기록·공유하게 하는 '오프라 법안'을 제정, 통과시키는 데 기여한다. 2011년 토크 쇼를 마무리한 그녀는 자신의 회사인 '오프라 윈프리 네트워크(OWN)'와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하포(Harpo)사 운영에 집중하고 있으며, 배우로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오프라 윈프리는 1985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컬러 퍼플],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2013), 2014년 화제작인 [셀마]의 제작과 조연을 맡는 등 영화인으로도 활동 중이다. 


최재필 기자 (보도자료/제휴 문의/오타 신고) movierising@hrising.com
 
 
(사진=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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