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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영화인이야!" 정부, 대통령, 독재자와 '맞짱' 뜬 네 명의 '간 큰' 영화인들

18.01.29 20:39


과거 정권의 '블랙리스트' 압박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켜온 우리나라 예술, 영화인들처럼 해외에서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정부의 잘못된 행동과 독재정권에 맞선 용기 있는 사례들이 있었다. 이들의 저항 방식은 자신들이 잘하는 영화 제작이었으며, 이러한 작품 완성을 통해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물론 그로 인한 압박도 있었지만, 이들이 남긴 작품과 신념 적 행동은 지금까지 전 세계 예술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 오늘은 거대 권력에 맞서 자신의 신념을 지켜온 사례들 중 네 명의 대표적인 영화인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조지 부시, 갈 때까지 가보자!" 마이클 무어 vs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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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와 나][빅 원]을 통해 GM과 나이키 같은 굵직한 미국 대기업을 과감하게 건드렸던 마이클 무어의 다음 표적은 미국 정부였다. 1999년 콜럼바인 고등학교의 총격 사건이 전 미국을 충격에 빠뜨린다. 모든 언론과 매체가 총격 사건을 저지른 두 고등학생에 초점을 맞추며 자극적인 보도를 했던 것과 달리 마이클 무어는 사건의 근원에 접근해 두 학생이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다가서려 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총기 문화의 문제점과 이를 조장하는 극우세력의 이면을 확인하게 되고, 이러한 배경을 기반으로 전쟁을 일으켜 이익을 보려는 조지 W. 부시(이하:조지 부시) 행정부의 부패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2003년 완성된 [볼링 포 콜럼바인]은 조지 부시를 향한 마이클 무어의 첫 선전포고였다. [볼링 포 콜럼바인]은 제75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을 수상하게 되는데, 이 자리에서 무어는 "조지 부시 우리는 당신이 부끄럽다"를 외치며 조지 부시 정권의 전쟁 정책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게 된다. 이후 이라크전이 본격화되고, 이를 통해 조지 부시 정권이 4년 재임기에 도전하려 하자 무어는 그동안 정리한 취재 자료들을 모두 모아서 [화씨 9/11]이라는 영화를 완성하게 된다. 

영화는 9/11 테러를 일으킨 주범 빈 라덴과 조지 부시 집안 간의 유착 관계를 낱낱이 파헤치며, 명분 없는 전쟁이 미국의 명성을 추락시킬 것이라 전해 부시의 재선이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 경고한다. 미국의 이라크를 향한 전쟁이 전세계적인 비난을 받고있는 가운데 [화씨 9/11]은 해외 영화인들의 엄청난 지지를 이끌어내며 제 57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는 기염을 토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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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9/11]의 조지 W.부시의 모습

이후 [화씨 9/11]은 미국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미국 전역에 공개되어, 미국 내에서 엄청난 찬반 논쟁을 불러오게 된다. 할리우드의 보수로 대변되는 배우 겸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마이클 무어가 우리집에 카메라를 들고오면 죽여버리겠다" 라고 엄포했을 정도로 미국내 진보와 보수의 격한 대립을 불러오게 했으나, 9/11 테러의 분노와 공포의 잔상에 사로잡힌 미국 대중의 선택은 여전히 조지 부시였다. 그렇기 부시는 2004년 재선에 성공하게 된다. 무어의 입장에서는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가 된 셈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다음 차기작을 준비하며 조지 부시를 향한 또 다른 한방을 준비한다. 그동안의 영화적 초점이 한 개인을 향한 노골적인 비판에 맞춰져 반대 여론을 자극했다고 생각한 무어는 다음 작품에서는 모든 미국인이 공감할 문제에 접근하기로 한다. 

그것은 바로 의료보험문제. 2007년 등장한 [식코]는 전쟁에 승리하며 세계 최강의 국가라 자부한 미국의 허술한 민영 의료보험 제도를 비판한 작품으로, 9/11 테러 현장에서 구조작업을 하다 폐기관에 손상을 입은 전직 구조대원이 쿠바에 가서 치료를 받는 장면을 그대로 보여줘 또 다른 이슈를 만들게 된다. 의료보험 제도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은 전쟁 명분에만 집착한 부시 정권의 8년을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이 되었고, 이는 [화씨 9/11]의 논쟁과는 전혀 다른 긍정적인 여론을 형성히게 된다. 전보다 한층 부드럽고 유연한 전개와 영화적 메시지를 통해 성숙한 비판자의 모습을 보여준 무어의 [식코]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궁지에 몰린 부시 행정부와 공화당의 몰락을 불러온 촉매제 역할이 되었다. 

▲제 7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조지 부시를 향해 "우린 당신이 부끄럽다!" 라고 외치는 마이클 무어

P.S: 현재 마이클 무어의 다음 상대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으로 이번 칸 영화제에서 트럼프의 치부를 드러낼 [화씨 11/9]를 선보일 예정이다. [화씨 9/11]의 숫자를 거꾸로 비유한 듯한 느낌이지만, 11월 9일이 트럼프의 공식 취임 날짜였다고 한다. 


"왜 아무도 이 인간을 비판하지 않는 거야?" 난니 모레티 vs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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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난니 모레티, (오른쪽)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前 이탈리아 총리

유럽에서 히틀러가 금기어가 되었듯이, 이탈리아에서는 그 히틀러와 함께 동급으로 금기시된 정치인으로 베니토 무솔리니가 언급되고 있다. 극우 파시즘 정책으로 이탈리아를 망친 주범이자 히틀러와 함께 2차 세계대전의 원흉으로 언급되는 인물인데, 그 무솔리니를 공개적으로 존경한다고 밝힌 정치인이 있다면 당연히 정신나간 인간이라 생각되겠지만, 문제의 장본인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이탈리아의 권력자였다. 그의 이름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축구팀 AC 밀란의 구단주이자 이탈리아의 최고의 미디어 회사와 기관을 소유한 언론 재벌로 스포츠, 경제, 연예계를 뒤흔들어 세 번이나 총리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1994~1995, 2001~2006, 2008~2011) 국민의 지지보다는 막강한 자본의 힘으로 권력을 쟁취한 케이스. 그가 총리로 재임하던 시절의 이탈리아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언론 재벌이 총리가 되니 자연히 언론장악이 이뤄지게 되고, 그로인해 모든 여론이 친정부 성향으로 바뀌게 된다. 정부를 제어할 비판 여론이 사라지게 되면서 정경유착, 비리, 회계조작 등의 스캔들이 끊이지 않게 발생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지도자라는 위상에 걸맞은 위엄이라도 있었다면 비판이 덜했겠지만, 베를루스코니는 그러한 명예와 체면마저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10대 모델들과 섹스파티를 즐기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정도로 화려한 여성편력을 자랑하는가 하면, 오바마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총리,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등의 우방의 정상들을 모욕하는 실언과 행동을 자주해 국가의 명예마저 실추시키기에 이른다. 이러한 여파로 인한 장기간의 경제 침체가 이뤄지게 되면서 이탈리아 국민들은 자국의 정치에 대한 희망을 잃은 지 오래였다.

베를루스코니가 언론을 비롯한 각 기관을 장악해, 그 누구도 반기를 들지 못하고 있자, 이탈리아의 국민 배우이자 감독인 난니 모레티가 '총대'를 메고 총리를 향한 비판 대열 앞에서게 된다. 평소 중도적 성향의 정치적 시각을 유지하며, 이탈리아 사회에 뿌리 깊게 박힌 극우, 나치즘 사상을 비판하던 그답게 베를루스코니에 대한 가차 없는 비난을 가하기에 이른다. TV 인터뷰와 공식석상을 통한 비난은 물론이며, 영화인답게 그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 메시지가 담긴 영화를 연이어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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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악어]의 한 장면

1997년 영화 [4월]은 난니 모레티 본인이 직접 실명으로 출연한 영화로 1994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우파 정당이 총선에서 승리한 뒤 1년 후의 이야기를 자신의 일상을 통해 표현하려 했다. 좌우파를 동시에 겨냥한 이탈리아 정치권을 향한 풍자물 이었지만, 그 안에는 베를루스코니의 당선이 불러온 정치적 비극과 절망감이 여실히 담겨있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난니 모레티의 베를루스코니를 향한 비판은 평범한 수준이었는데, 2001년 베를루스코니가 두 번째로 총리로 당선돼 언론장악에 나서려 하자, 영화를 뒤로하고 대정부 투쟁에 나서게 된다. 베를루스코니가 선을 넘는 행동을 했다고 생각했기에, 이탈리아와 유럽의 미래를 위해 그를 막아야 한다고 결심한 것이었다. 방송독점 반대와 정치권 평등을 위한 여러 사회 운동에 적극 나서며 '안티 베를루스코니'를 자처하며 4년 동안 투쟁에 나서다가, 2006년 영화 [악어]를 통해 다시금 영화계로 복귀하게 된다. 

온전한 영화로 복귀한 듯 보였으나, [악어]는 베를루스코니에 관한 영화였으며, 영화의 제목은 그에 대한 명칭이나 다를바 없었다. 난니 모레티는 영화속 주인공의 모습과 베를루스코니의 모습을 빗대며 부패하고 더러운 돈을 번 그를 향한 적나라한 비판을 가하는 동시에 그러한 인생에 대한 애처로운 시선을 보낸다. 국가의 지도자를 풍자한 영화를 내놓았다는 점에서 난니 모레티의 작품을 향한 관객들의 호불호와 논란은 자연히 클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베를루스코니의 야망이 언론을 비롯한 문화계 장악에 이르게 되면서, 뒤늦게야 이탈리아 예술인들이 난니 모레티를 향한 지원 사격에 나서게 된다.

에토르 스콜라, 카를로 베르도네와 같은 유명 영화인들이"베를루스코니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동안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라며 선언하는가 하면, B급 포르노 영화 감독들이 베를루스코니의 미성년 성매매 사건을 풍자한 [붕가붕가 프레지던트]라는 영화를 내놓으며 우파 정권을 향한 비판 여론을 형성하게 된다. 지속적인 경기침체로 인한 여론 악화로 베를루스코니의 권력은 2011년 말이 되어서야 막을 내리게 된다. 


연기로 히틀러를 조롱하다! 찰리 채플린 vs 아돌프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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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역사관으로는 의아하게 느껴지겠지만 1930년대 미국과 유럽은 독일 히틀러의 나치에 꽤 우호적인 편이었다. 히틀러를 적으로 돌린다면 그때야말로 전쟁을 불러올 수 있기에 그에게 비판을 가하는 행위를 통제하고 있었다. 모두가 히틀러의 반유대/민족, 독재 정책에 침묵하고 있을때, 당시대의 인기스타 찰리 채플린이 총대를 메고 침묵에 도전했다. [위대한 독재자]는 누가 봐도 히틀러를 패러디하고 망가뜨린 작품으로 그의 비인간적 정책과 독일의 우경화에 대해 경종을 울린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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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위대한 독재자]의 한 장면

[위대한 독재자]가 개봉되자 미국 내에서는 채플린에게 압력을 가했고, 이웃 나라 영국은 영화의 상영 자체를 금지했다. 오히려 관객들은 히틀러를 비난한 채플린을 공산주의자에 유대 신봉자라고 비아냥거리며 그가 등장하는 장면에 토마토를 던지고는 했다. 하지만 1940년에 들어서 상황은 역전된다.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되자, 미국과 영국은 [위대한 독재자]를 선전영화로 적극적으로 장려하며, 뒤늦게야 채플린의 업적을 드높여주었다. 다시금 영화계의 영웅으로 복귀한 채플린이었지만 전쟁이 끝난후 진행된 매카시즘 열풍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을 휩쓴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으로 인해 채플린은 공산주의자로 오해받게 되고, 결국 미국에 추방당하게 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히틀러의 애정 공세를 단칼에 거절한 용기 있는 미녀! 마를레네 디트리히 vs 아돌프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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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영화계의 여신으로 불린 마를레네 디트리히. 독일의 국민 여배우였던 그녀는 도시적인 이미지와 허스키한 목소리, 그리고 매력적인 각선미로 당시의 전 세계 남성들을 매료시킨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이러한 세계적인 인기 덕분에 그녀는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되었고, [모로코][상하이 특급][몬테카를로 이야기]와 화제작과 거장 조셉 폰 스턴버그 감독과 함께 일하는 영예를 누렸다. 당대 최고의 여신인만큼, 그녀와 관련한 스캔들도 엄청났다. 프랭크 시나트라, 율 브리너, 장 가뱅 같은 남자 스타들과의 연애는 물론이며, 전쟁 이후에는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염문설이 있었고, 심지어는 여성들과의 비밀스러운 연애 관계를 맺었을 정도였다. 

이처럼 남녀를 가리지 않는 애정을 과시한 그녀에게, 조국 최고의 지도자가 대시하기에 이르니, 그가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히틀러 또한 마를레네의 매혹적인 모습에 매료되 어떻게든 그녀와의 만남을 주선해 자신의 여자로 삼을 계획을 갖고 있었다. 독일에서의 국민적 인기를 지닌 지도자의 애정공세를 받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지만,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히틀러가 생각하는 호락호락한 여성이 아니었다. 그녀는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당시대 사람들의 인식과 편견을 넘어설 정도로 매우 지적인 동시에 확고한 신념을 지닌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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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모로코]에서 당대 최고의 스타 게리 쿠퍼와 함께 한 마를레네 디트리히

평소 히틀러의 파시즘적인 사상과 유대인 학살을 경멸하고 있었던 그녀였기에 히틀러의 구애는 그녀에게 모욕과도 같았다. 당연히 그의 만남을 보기 좋게 거절한 그녀는 한술 더 떠 미국 언론을 통해 히틀러와 그의 사상에 물든 조국을 향해 가차 없는 비난을 가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할리우드로 진출하기 전에도 나치로 부터 선전 영화에 출연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단번에 거절한 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그녀의 과감한 행동에 히틀러와 나치는 놀랄 수 밖에 없었고, 역으로 그녀를 향한 비난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디트리히는 그러한 조국의 탄압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치를 향한 비난에 앞장서며 전쟁이 발발한 시기에는 연합군 진영의 위문 공연을 자처하며 전쟁터를 돌아다녔다.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이후에 디트리히는 미국, 프랑스, 영국으로부터 명예 훈장을 받으며 전쟁 승리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게 되고 미국, 프랑스로 부터 국민적인 사랑까지 받게된다. 하지만 패전 이후에도 그녀를 향한 독일 국민들의 여론이 좋지 못한 탓에 디트리히는 독일로 돌아올 수 가 없었다. 이후 미국과 프랑스를 전전하며 쓸쓸하게 여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내가 죽으면 독일 서베를린에 있는 묘지에 꼭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긴 덕분에 죽은 이후에야 조국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생전 인터뷰를 통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히틀러의 구애를 거절한 것이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며 불의의 편에 서지 않은 자신의 행동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최재필 기자 (보도자료/제휴 문의/오타 신고) movierising@hris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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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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