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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비하인드] 위대한 영화 감독 vs 아동성추행범…두 얼굴을 지닌 천재 우디 앨런

18.02.08 19:13


매번 놀라운 작품을 내놓으며 천재 감독으로서의 재능을 발휘하고 있지만, 계속되는 소아성애 및 성추행 의혹으로 영원히 고통받고 있는 우디 앨런과 관련한 비하인드를 모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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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앨런 스튜어트 코니그즈버그 (Allan Stewart Konigsberg)
생년월일: 1935년 12월 1일 
신장: 165cm
출생지: 미국 뉴욕 주 뉴욕 브루클린


1. 슬기롭고 독특한 유년기 취미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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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 유년기 소년들처럼 야구 같은 스포츠를 즐기는 걸 좋아했지만, 또 하나의 독특한 취미가 있었으니 바로 나치를 욕하는 것이었다. 우디 앨런 집안이 전통적인 유대인 집안이었던 탓에 2차 대전 나치의 만행을 매우 경멸스럽게 바라봤다. 어린 시절부터 터득한 남다른 욕설과 조롱하는 행동이 훗날 우디 앨런의 창의적인 영화 창작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보고 있다. 


2. 학교생활이 싫어 엉뚱한 일을 해온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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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다운 천재들이 그렇듯, 학교생활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렇다고 반항적이거나 활발하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소심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소년이었지만, 혼자서 공상하며 글쓰기를 좋아했던 탓에 수업시간에 노트에 혼자 생각한 농담거리와 좋아하는 여자아이에 관한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이렇게 터득한 혼자 놀기의 진수는 얼마 안 가 우디 앨런의 소소한 용돈 거리가 되었다.  


3. 15살 때부터 돈을 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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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의 우디 앨런은 종이 신문의 유머 섹션을 읽는 것을 즐겼으며, 초등학교 시절부터 생각해온 자신의 유머와 농담거리를 신문사에 보냈다. 우디 앨런의 유머는 신문의 유머섹션에 종종 실리게 되었고, 편집자와 독자들로부터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자신의 이름이 유명해지기 원치 않았던 앨런은 신문사에 보낸 자신의 필명을 본명이 아닌 '우디 앨런'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냥 생각나서 지은 이름이었다는데, 이것이 평생의 이름이 될지는 당시의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4. 스탠딩 코미디언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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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에서 1969년까지 영화인이 아닌 스탠딩 코미디언으로 유명했다. 신문 조크로 유명세를 타던 우디 앨런은 십 대의 나이에 NBC의 토크쇼의 작가로 고용되어 1주일에 25달러의 비용을 벌게 되었다. 토크쇼는 크게 히트하게 되었고, 우디 앨런의 명성도 자자해지자 매니저로부터 스탠드업 코미디를 해보라는 공식적인 제안을 받게 되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무대 앞에 서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적응하게 되었고, 뉴욕의 유명 나이트클럽인 비터 엔드의 메인이 되어 스탠딩 코미디언으로서의 명성을 이어가게 된다. 나이트 클럽에서의 성공으로 앨런은 NBC 쟈니 카슨쇼의 게스트로 활약하게 되었고, 1965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건 우디 앨런 쇼를 진행하게 된다. 


5. 재능있는 재즈 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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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 작가 외에도 재즈 뮤지션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앨런은 종종 뉴욕의 재즈 클럽에서 밴드와 함께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것을 즐겼다. 매주 월요일 저녁에 진행되는 재즈 공연을 이유로 아카데미 시상식을 불참했을 정도로 그의 재즈 사랑은 대단하다. 19살 때는 에드 설리번, 투나잇 쇼의 CM 음악을 작곡해 상당한 저작권료를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6. 그가 사랑에 빠진 첫 번째 영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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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과 재즈 뮤지션 사이에서 그의 인생을 영화의 길로 인도하게 만든 작품은 무엇일까? 우디 앨런은 3살의 나에 어머니와 함께 관람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를 보고 영화와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고 밝혔다. 그때의 감동을 여러 직업군을 오가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유지한 덕분에 지금의 영화감독으로서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7. 천재, 대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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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며 어린 나이에 사회에서 성공했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학교 생활을 적응하지 못해 대학교 퇴학이라는 굴욕을 맞게 된다. 사유는 다름아닌 시험 컨닝. 너무나 대놓고 컨닝을 한 탓에 바로 걸리게 되자 우디 앨런이 내놓은 변명은 다음과 같았다.

"난 시험지가 아니라 시험을 치고 있었던, 그 녀석의 영혼을 바라봤을 뿐이라구요..."


8. 감독이 되기로 결심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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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으로 승승장구한 그에게 드디어 영화 작업 제의가 들어오게 된다. 그에게 들어온 제안은 출연이 아닌 각본이었다. [고양이]라는 영화의 각본을 담당해 나름의 재능을 발휘했지만, 막상 공개된 결과물을 보고 크게 실망하게 된다. 자신이 생각한 아이디어들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채 사실상 감독이 마음대로 만들어버린 작품이 된 것이다. 우디 앨런은 이때부터 영화는 감독의 작품임을 깨닫게 되고, 자신이 감독이 되어 원하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그렇게 스튜디오를 설득해 자신이 직접 각본, 연출을 맡게 된 작품이 1969년 영화 [돈을 갖고 튀어라] 였으며, 이 작품이 크게 성공하게 되면서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 


9. 저예산으로 2배 이상 벌어들이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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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효과, 스턴트, 스타급 배우 등 돈이 많이 들지 않는 코미디 계열 영화를 주로 제작하기 때문에,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저예산으로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의 명성 덕분인지 작품들 모두 2배 이상이 넘는 수익을 올렸다. 1971년 영화 [바나나]는 제작비 200만 달러로 1,180만 달러를 벌어들였으며, [당신이 섹스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은 20만 달러로 90배가 넘는 18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이후 제작된 작품들 모두 몇 배 이상의 수익을 거둬들여, 우디 앨런이 지속해서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여담으로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제작비가 2억 3,700만 달러라는 소식을 듣고 "젠장, 그 돈은 내가 영화 50편 찍는 액수인데..."라며 부러워했다고 한다.   


10. 아날로그 감성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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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 작가로 활약하던 1960년대 타자기를 지금도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우디 앨런은 컴퓨터를 소유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메일도 단 한 번도 보낸 적이 없다고 한다. (대신 휴대폰은 아이폰을 사용 중) 이처럼 아날로그적인 도구로 작업하는 것을 고집하는 편인데, 1990년 초에 돌비 디지털 녹음 방식이 유행하는 와중에도 모노 녹음 방식을 고집한 일화는 유명하다. 


11. 극과 극 성향을 지닌 대표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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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작품이 수다스러운 농담이 가득한 블랙 코미디지만, 자세히 보면 분위기와 성향이 너무나 다른 극과 극 성향의 작품들이 많다. 초기작 [바나나][당신이 섹스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이 대중적인 정통 코미디에 가까웠다면, [애니홀]은 좀 더 성숙한 로맨틱 코미디물로 지금의 우디 앨런의 성향과 가장 가까운 작품이었다. [애니홀]에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우디 앨런은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발전 시키기 위해 [인테리어] 같은 인간의 삶을 연구한 진중한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코미디를 좋아한 그의 팬들이 [인테리어]에 불만족을 느꼈음을 알게 되고, 1980년 [스타더스트 메모리스]와 같은 코미디와 드라마가 섞인 작품을 창작하며 자신만의 특성을 완성하게 된다. 2005년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와 스칼렛 요한슨이 출연한 [매치 포인트]는 그의 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스릴러 드라마로 잠시 그만의 특성을 벗어난 작품이었다. 


12. 그가 만들고 싶어 하는 블록버스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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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예산 위주의 영화를 주로 만들고 있지만, 실제로 해보고 싶은 작품은 거액의 제작비가 투입되는 영화라고 한다. 오래전부터 구상한 [아메리칸 블루스]라는 작품으로, 재즈 뮤지션인 루이 암스트롱과 시드니 베쉐가 등장하는 음악 전기 영화다. 재즈 뮤지션이자 애호가인 그의 성향을 잘 드러낸 작품으로, 예상되는 투입 제작비만 무려 8천만 달러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 공식적인 차기작 목록에 없는 것으로 볼 때 한참후에 제작될 작품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13. 비관론자인 그가 좋아하는 자기 영화 6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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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영화를 만들었지만, 정작 자신의 연출작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인정한 자신의 작품은 딱 6편. [젤리그] (1983), [카이로의 붉은 장미] (1985), [부부 일기] (1992), [브로드웨이를 쏴라] (1994), [매치 포인트] (2005),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2008) 등이다. 


14. 의외의 여성 편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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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러스함과 여성스러운 면을 지닌 덕에 여성들과의 관계가 많은 편이다. 공식적으로 세 번 결혼했다. 19세 때 대학원생인 할렌 로젠과 첫 결혼하가 얼마 안 가 이혼했으며, 두 번째는 배우인 루이스 래서, 세 번째가 논란의 주인공 순이 프레빈이다. 결혼식 전에는 다이앤 키튼, 미아 패로 등의 유명 배우들과 연인 사이를 유지했을 정도로 수많은 여성들과 교제해 왔다. 


15. 미아 패로우와의 운명(?)적인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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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웃 스타 미아 패로는 프랭크 시나트라, 지휘자 앙드레 프레빈과 결혼과 이혼을 반복할 정도로 파란만장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다가 1983년 [젤리그]에서 함께 작업한 우디 앨런과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다. 두 사람 다 두 번의 결혼 생활 실패라는 경험을 안고 있었기에 결혼보다는 동거를 택했다. 여기에 전 부부 사이에서 낳은 자녀와 입양아들이 있어서 함께 동거할 당시에만 10명의 자녀가 있었다. 이 만남이 재앙이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16. 논란의 성추행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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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앨런은 미아 패로와의 동거 생활당시 딜런과 순이를 성추행한 의혹을 갖고있다. 

첫 번째 사건은 우디 앨런이 입양한 여아 딜런에게 썬크림을 발려주다 성추행을 시도하는 모습을 미아 패로에게 들키면서 시작되었다. 사건은 우디 앨런이 빌고 사과하며 무마되는 듯 싶었지만, 미아 패로는 우디 앨런의 이러한 행태에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1992년 자신의 입양 딸 순이와 우디 앨런 사이를 심상치 않게 여긴 미아 패로는 우디의 서재에서 순이의 누드 사진들 발견하게 된다. 충격을 받은 미아 패로는 이 일을 경찰과 언론에 알리게 되고,  이는 곧 미국 사회를 뒤흔든 논란의 사건이 된다. 길고 긴 법정 분쟁 끝에 미아 패로는 우디 앨런 사이에 있던 자녀들의 양육권을 되찾게 되지만, 정작 순이의 양육권을 찾아오는 데 실패한다. 20살 성인이 된 순이가 양부인 우디 앨런과 함께 사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순이의 결정에 놀란 미아 패로는 "우디 앨런이 어리고 순진한 순이를 꼬드겼다."라고 언론 플레이를 하며 어떻게든 자신의 입양아를 데려오려 했지만, 두 사람은 이미 잠적한 상태였다. 사회적으로 큰 질타를 받은 우디 앨런은 아무렇지 않은 듯 순이와 함께 동거하며, 영화 작업에 몰두했고, 1997년 12월 이탈리아에서 비밀결혼식을 올리며 입양 관계에서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했다. 현재, 우디 앨런과 순이 프레빈은 부부 관계를 유지하며 두 명의 자녀를 입양하며 그들만의 가정을 꾸리고 있다. 

미아 패로는 남겨진 자녀들의 양육에 몰두했으며, 유니세프 친선대사직을 겸하며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사회운동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 사건이 잊혀질 때 쯤, 우디 앨런에게 성추행을 당한 것으로 알려진 딜런은 2014년 뉴욕타임스에 자신의 글을 기고해, 양부 였던 우디 앨런이 자신을 성추행 했던 일련의 사건들을 상세하게 고발해 다시금 논란의 불을 지폈다. 


17. 그것이 알고싶다...우디 앨런은 억울하다? 모든것은 미아 패로의 농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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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이런 논란이 나올 때 마다 우디 앨런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의 지인들과 관계자들도 "우디 앨런은 누명을 썼다"라며 적극 두둔했다. 우디 앨런 측이 부인하는 것은 의붓딸 딜런 패로 성추행 사건에 대한 의혹이다. 만인에게 엄청난 비판을 받고 있는지만, 우디 앨런이 이렇게 대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은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우디 앨런 측이 주장한 내용이다. 

우디 앨런의 변호인 엘칸 아브라모비츠은 NBC '투데이쇼'에 출연해  "성추행 논란은 이미 종결된 사건이다. 이 모든 것은 우디 앨런에게 상처를 주려는 미아 패로의 계획된 농간이다. 패로가 자녀들을 조종해 우디의 명예를 훼손하려 한다" 라고 주장했다. 즉, 있지도 않은 성추행 사건을 미아 패로가 만들어내 당시의 어린 자녀였던 딜런에게 세뇌시켰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사건은 20년 전 법정까지 갔으나, 증거를 찾을 수 없어 아무런 판결이 내려지지 않은 채 종결되었다. 미아 패로가 20년 전 일어난 사건을 다시금 이슈화 시키는 것은 前 남편 우디 앨런이 지속적으로 상을 수상해 영화계의 거장으로 칭송받고 있는 것이 화가 났기 때문이라는 것이 변호인의 주장이다. 

2014년 1월 11일 우디 앨런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상을 수여받은날, 미아 패로는 실시간 SNS를 통해 우디 앨런의 수상을 공개적으로 조롱하다 난데없이 20년 전 딜런 패로의 성추행 사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같은 논란이 SNS를 넘어 각종 매체를 통해 전해지게 되면서, 다시금 우디 앨런의 성추행 사건이 사회적 논란으로 부각하게 되었다. 패로의 계획(?)이 어느 정도 성공한 셈. 

하지만 미아 패로의 이러한 의견에 허술한 면이 많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영화제작자 로버트 웨이드는 한 매체에 글을 기고해 패로가 주장하는 성추행 사건의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성추행 사건이 제기된 시점은 앨런과 순이의 관계로 인해 두 사람이 양육권 소송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재판이 한창 진행돼 조심해야 될 와중에 굳이 前 여자친구 집을 찾아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행위이며, 유모와 다른 아이들도 있는 상황에서 은밀하게 사건을 저질렀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당시 사건을 조사한 코네티컷주 경찰 수사팀의 최종 보고서는 "우디 앨런은 딜런을 성추행하지 않았다"라고 적혀 있으며, 딜런의 신체를 조사한 의학전문가들도 "성추행의 흔적은 없었다" 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당시 딜런의 심리상태를 조사한 전문가들은 "딜런이 주장을 번복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고, 말투 또한 미리 연습을 한 것처럼 어색해 보였다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당시 조사팀을 이끌었던 존 레벤탈 박사는 "딜런의 주장은 감정적으로 동요된 소녀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진술이거나, 엄마 또는 누군가의 영향을 받고 말한 진술 같다. 진실과 거짓이 섞인 모호한 진술이어서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라고 말하며 진술에 문제가 많다고 주장했다. 

우디 앨런의 성추행 논란은 법적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아직 양측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탓에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자료출처: ppcorn.com, ranker, afkinsider, 위키피디아, IMDB 트라비아, 일요신문


최재필 기자 (보도자료/제휴 문의/오타 신고) movierising@hris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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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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