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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의 블록버스터 [설국열차&엘리시움] "1%들이여 긴장하라!"

13.07.24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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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조커의 과거라는 키워드로 상반기 화제의 영화중 하나였던 [웃는남자]. 영화의 마지막 주인공 그윈플렌은 자신의 회복된 신분으로 의회에 서게되고 우스꽝스러운 그의 찢어진 입을 비웃는 의원,귀족,국왕을 향해 그는 분노의 찬 외침을 던진다.
 
"우리가 반드시 당신들의 썩은 창자를 도려내고 목을 쳐버리겠다!"
 
그것은 곧 99%의 백성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외면하고 있는 1%의 특권층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였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이 말은 하반기의 거대한 메시지를 지니고 있는 두편의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등장을 예고하는 대사와도 같았다. 봉준호 감독의 글로벌 프로젝트 [설국열차]와 [디스트릭트9]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은 닐 블롬캠프의 신작 [엘리시움]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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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영화는 그윈플렌의 외침이 '프랑스 대혁명'을 향한 경고로 연결되었던 것처럼 21세기의 '계급 혁명'을 예언하는 또 다른 외침과도 같은 공통점을 지닌 영화이다. 이 블록버스터 물들의 출현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블록버스터의 소재가 된 '빈부격차'
 
영화는 언제나 시대를 대변한다. 한때 전쟁에 대한 반전적인 시각을 가진 영화들이 유행했듯이 이번 영화계의 이슈는 신자유주의 시장이 낳은 폐해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고있다. 그동안의 이러한 폐해가 마이클 무어, 켄 로치와 같은 진보적 영화감독들의 독립영화로 여러번 이야기 되었지만 대중을 위해 만들어지는 블록버스터의 주소재가 되었다는 점은 의미있는 일이다.
 
이는 세상을 하나로 연결해주고 서로에게 이득이 될것이라는 '세계화'의 논리가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 시작된 세계 금융위기로 이어져 '허상'이 되면서 부터였다. 경제 공황으로 많은 이들이 어려움에 처했지만 정작 가진자들은 부자가 되는 '빈익빈 부익부'와 같은 아이러니한 상황이 생기며 '1% VS 99%' 라는 구호가 만들어 지기도 했다. 이는 가진자 1%로 인해 피해받는 우리를 99%로 비유한 것 이었다. 사실 빈부간 갈등은 자본주의 경제가 시작된 이래 지속되어온 문제였고 영화의 주소재로 다양하게 표현된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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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랑의 1927년 SF영화 [메트로 폴리스]는 부유한 지상 세계와 가난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지상 세계를 지탱하는 지하 세계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며 지하세계를 교란시키기 위해 지상에서 보낸 안드로이드 '마리아'가 지하의 혁명을 선동해 계급투쟁으로 이어지는 내용을 담고있다. 이를통해 자본주의 시스템의 투쟁을 이야기 시작한 '빈부 갈등'은 현대로 들어선 2005년, [랜드오브데드]를 통해 좀비 영화로 까지 표현되기에 이른다. 두 영화가 '계급간 저항'이라는 공통적 의미를 지녔지만 메시지는 확연하게 달랐다.
 
랑의 [메트로 폴리스]가 안드로이드 '마리아'의 정체를 시민들이 알게되면서 계급간의 화해로 끝나는 반면 로메로의 [랜드오브데드]의 버려진 서민들을 비유한 '좀비'들은 '피들러 그린'의 남녀노소 부유층들을 잔인하게 잡아먹는다. 과거에는 서로가 공존할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볼수 있음을 암시했지만 현재의 세계는 해결책 없이 반복되는 빈부의 역사에 이제는 '분노'로서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했다.  어쩌면 그 '분노'가 '점령'으로 까지 이어지게 된 [설국열차]와 [엘리시움]의 등장은 예정된 필연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두 영화는 어떤 시각으로 시대를 대변하려 한것일까?
 

*21세기 '바스티유' 열차와 우주도시
 
18세기 기아와 가난에 허덕이는 프랑스 민중들은 귀족들을 향해 빵을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답변은 "빵이 아닌 고기를 먹으면 될거 아니냐" 였다. 애초에 그들은 민중들을 사람 취급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기울이지도 않은 것이었다. 이러한 소통불가에 분노한 민중들은 '바스티유 감옥'으로 돌진했다. '바스티유 감옥'은 바로 그들의 '권위'와 '소통불가'의 상징이었다. 민중들이 그곳을 점령하자 기득권층은 그제서야 민심의 두려움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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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와[엘리시움]은 바로 이러한 '바스티유 점령' 사례에 기인하여 출발한다. [설국열차]의 꼬리칸 주민들은 부족한 자원과 식량을 요구 했지만 기차의 주인 '윌포드'는 폭력과 위협으로 답을 했고 기차안 기득권층은 애초에 정해진 자리대로 기차에 탑승한거라며 주제를 파악하며 "자리를 지켜!"라고 답변한다. [엘리시움]의 경우는 어떠한가? 모든게 황폐해진 지구를 탈출하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기득권층이 사는 천상의 도시 '엘리시움'을 향해 날아가지만 그들이 던지는 답변은 '폭격'이었다.
 
'소통단절','침묵' 그리고 '폭력'으로 답변을 대신하는 세상을 향해 두 작품은 민중들의 '점령'과'침투'가 오늘날 다시 재현될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의 기득권이 어떻게든 '제2의 바스티유 사태'와 같은 민중혁명이 일어나지 않도록 시스템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은 무의미 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기차의 맨 앞칸'과 미래의 '우주도시'를 향한 '점령'은 18세기 '바스티유 감옥 점령'의 21세기 버전이자 상징을 담은 픽션이다.
 

*봉준호와 닐 블룸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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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위험한 '혁명적 작품'을 기획,연출한 봉준호와 닐 블룸캠프는 누구인가? 다른 국적을 갖고있는 연출자들이지만 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비슷했다.
 
봉준호의 영화속 한국사회는 항상 치부가 가득했다. 권위주위의 사회에 비유를 맞춰야 살아가야 하는 세상(플란다스의 개),살인범을 잡는것 보다 더 급한 국가적 행사(살인의 추억),시민의 말을 무시하고 격리만 하는 정부(괴물) 그리고 어머니를 범죄자로 만들만큼 상세하게 사건에 접근하기 보다는 수습하는데 급급한 공권력과 사회 시스템(마더)등 국가와 사회지도층의 무능함을 촌철살인적인 시각으로 비웃으며 그들을 비판했다. 봉준호는 이러한 집단의 윤리적 부재가 만들어낸 폐해로 피해받게된 개인들에 초점을 맞춰 대한민국의 우울한 역사를 재정의 한다.
 
닐 블룸캠프는 단 한번의 작품으로 남아공을 비롯한 글로벌 사회의 문제점을 이야기 했다. '로즈웰'과 같은 미스테리적 신비주의가 가득할거 같은 외계인 게토 지역 [디스트릭트9]을 '슬럼'지역으로 그려낸 것이다. 위협적일 거라 생각했던 외계인들은 오히려 먹을것과 부족한 자원을 찾기위해 방황하고 있는 '난민'들이었고 정부와 시민은 이들을 '벌레'보다 못한 존재들로 취급한다.
 
영화의 원작인 본인의 단편영화 [얼라이브 인 요하네스버그] 에서도 표현 했듯이 이것은 남아공의 치욕적인 역사인 '아파르헤이트'(인종분리정책)에 관한 적나라한 풍자였다. 비록 이제는 사라진 정책이라 하지만 이제 그 대상은 빈부격차와 같은 가난한 사람과 부자들을 나누는 정책으로 변모했음을 암시했으며 이는 글로벌 지구촌의 세계도 마찬가지 라는 것을 암시했다. 부촌지역과 난민촌이 나눠지는 도시의 현실, 그리고 후진국과 선진국이 나눠질수 밖에 없는 현실이 블룸캠프가 바라본 '아파르헤이트'였다.
 
과거의 작품으로 명성을 얻고 더 후한 지원을 통해 거대한 블록버스터를 만들게 된 그들이었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반골적인 본성을 버리지는 못했다. 시대가 흘러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그들의 시대적 사명처럼 남겨졌기 때문이다.
 

*But 혁명과 저항만이 답일까?
 
어찌본다면 이 두 작품은 좌파적 시각과 색깔을 띌수밖에 없는 영화라는 인상을 줄수도 있다. 민중의 봉기와 극단적으로 보이는 계급별 거주지의 차이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연상케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설국열차]와[엘리시움]은 해답을 제시하거나 직설적인 메시지를 던지려 하지 않는다.
 
[설국열차]의 시사가 끝난후 한 리뷰어는 "승리가 없는 영화"라고 정의했다. 약한 민중의 입장에 선 영화 같았지만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현실과 대면함으로써 저항에 대한 물음표를 남겼다. 그동안 저항의 의미를 내포했던 영화를 연출했던 '젊은 봉준호'가 성숙하게 세상을 바라보려고 하는 것일까?
 
아직 개봉하지 않은 [엘리시움]은 쉽게 정의할수 없는 작품이지만 내용과 앞서 공개한 15분 하이라이트 영상을 통해 유추해 본다면 '민중적인 혁명' 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엘리시움'을 침투하는 이야기였다. 물론 주인공 맥스(맷 데이먼)가 99%의 민중을 대표하는 캐릭터라 지만 애초에 '엘리시움'에 꿈이없었던 그는 어쩔수 없는 상황때문에 어둠의 진로를 통해 '엘리시움'에 가려한 것이었다. 그러한 인과적 목적을 위해 금단의 장소로 온 주인공 이기에 그가 '엘리시움'을 점령하려거나 멸망케 하려는 목적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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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움]과 소재가 비슷한 일본만화 [총몽]을 보더라도 부유한 공중도시 자렘과 가난한 지상세계를 극명하게 보여주지만 결말부 주인공 갈리는 자신을 희생해 위기에 처한 '자렘'을 구한다. [엘리시움]의 맥스가 갈리까지는 아니어도 어떻게든 우주도시와 지상의 공존을 위한 메시지의 전달이 영화의 주목적이 아니었나 예상해본다.
 
결국 두 영화는 인간이 만들고 인간에게 행해지는 문제는 자연의 법칙처럼 돌고 돌수밖에 없는 것이다 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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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의 입장을 대변하며 1%에게 경고의 메세지를 남기려 한 이 영화들은 정작 우리에게 답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영화가 블록버스터로 변모되면서 1%에게 하고싶은 말은 단 하나다.
 
"이것이 영화속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영화는 현실을 위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단지 깨닫게 해줄 뿐이다. 그것이 우리가 이 두 작품을 주목하는 이유다.
 
 
 
 
(사진=CJ 엔터테인먼트,IMDB,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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